<내마음속의문화유산>13. 쌍봉사 부도.탑비와 대웅전 그리고 논배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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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누구라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한두가지 옛 것이 없을 수 없다.가까이는 살림 살고 있는 방안으로부터 집 주변,그리고 눈에 보이는 산천을 둘러보면 조상 대대로 손때가 묻은 고적이나 문화 유산들이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진정한 문화유산은 박물관의 전시실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다.우리 삶의 무대에 배치돼 있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생활과 관련이 있는 한은,그리고 거기에 한두마디 특별한 설명을 붙일 수 있다면 다 전통이고 역사고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그러니 설명하기 나름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극락의 가장 귀한 보물 간직 그러나 나에게는 참으로 유별난 인연이 있는 자랑거리가 있다.전남화순의 쌍봉사(雙烽寺)경내에 있는 철감선사(澈監禪師)의 부도(浮屠).탑비(塔碑)와 대웅전이다.초등학교 6년간 봄.가을로 모두 열두차례 소풍을 간 중에 정확히 여덟번을 그 한곳으로만 다녀 왔다.그때는 너무 지겨운 곳이기도 했다.집에서 그 절까지 20리.초등학교 어린 시절 굽이굽이 산길로 왕복 40리를 고무신 끌면서 다녀오느라면 하늘이 노래질 지경이었다.그래서 그때는 소풍가는 것이 싫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이제는 넓은 포장길 자동차로 편안히 앉아 다녀올 수 있으니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쯤 둘러 봤을 것이다.그때는 산모퉁이를 돌고 또 돌아가기를 한없이 하다가,도무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그 좁은 골짜기에서 느닷없이 불쑥 절간을 보았다.

우리의 고적을 찾아가는 제격은 그래도 터덜터덜 걸어 당도하는 것이다.그래야 관광이 아닌 조상의 체취와 더불어 과거로의 여행이 가능해진다.

거기 우리나라 최고의 화려하고 우아한 돌,철감선사의 사리를 넣은 부도가 숨어 있다.이것은 과장이 아니다.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이처럼 말할 것이다.그러니까 지금부터 1천1백년여 전인 9세기말에 만들어진,신라의 도윤(道允)이라는 고승의 무덤이다.재료는 돌이면서도 목조건축을 모양냈다.기와로 얹은 지붕이 영락없이 암막새.수막새의 와당에 연꽃무늬가지를 넣어가면서 이어간 모양이다.그 밑의 서까래는 틀림없는 나무 모양이다.

왜 돌을 사용하면서 굳이 그보다 연약한 나무 흉내를

냈을까.팔각(八角)형태의 탑신(塔身)에는 천의(天衣)자락을 날리며 구름 위로

비상하는 천인상(天人像)을 비롯해 사천왕상,그리고 자물쇠까지 갖춘 문짝이

새겨져 있는데 지금이라도 열쇠가 있으면 금방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것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아마 그 안에 극락세계의 가장 귀한 보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1천년전의 현인(賢人)들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그 진귀한 것은

무엇일까.나른한 상상의 날갯짓에 신비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다.

기단부(基壇部)는 여의주를 받든 채 구름 사이로 하늘을 나는 두마리 용을

비롯한 사자상,화려한 연꽃 무늬,그리고 극락의 새들이 온갖 악기들로

연주하는 모양에 오히려 눈이 부시다.

이 부도는 아름다움에서,그 의미의 심오함에서,보는 이들로 하여금 한없는

신비의 세계로 이끌어들인다.눈으로 보는 즐거움에 더해 귀로는 천사의

음악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철학의 심오한 묘미를 깨닫게 한다.다만 내가

그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이다.

이 부도는 세상에 알려진 것이 오래지 않다.국보로 지정돼 보호받은 것도

1963년부터다.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건 말건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신비와

진리를 품고 서 있었다.그 오랜 세월의 비밀을 함부로 능하는 듯해

송구스럽다.

이 부도 옆에 철감선사의 탑비가 있다.비문이 새겨진 비신은 사라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과 이수라고 하는 덮개 부분만 남아 있다.여기에는

전액(篆額)으로 열 글자가 고졸하게 새겨져 있어 주인공을 확인해주고

있다.비신(碑身)은 어디로 갔을까.누가 무슨 이유로 없애버렸을까.나는

그곳에 가면 주위를 괜히 두리번거리곤 한다.어느 구석에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을 것같은 착각에서.물론 살아 기어가는 듯한 거북의 모습이나 용틀임하는

용의 형상이 또한 부도 못지 않은 뛰어난 신기(神技)를 보여주고 있다.

한순간에 잿더미 되고 말아 쌍봉사 대웅전은 10 높이 조선중기

목조건축으로 그 가치가 뛰어난 건물이었다.3층으로 목탑 형식을 취하고

있어 건축 기술면에서나 형식에 있어 우수한 것이며 조선중기 건축으로

드물게 남아 있던 보물이었다.

아,그러나 84년 한순간에 불공드리던 촛불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나는

그 소식을 듣고 어릴적 그렇게 다정하던 친구를 잃어버린 듯한 서러움에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아마 한심한 속세를 떠나 부처님 세계로

가버린 것같다.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보물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간직할 복(福)도 없다는

말인가. 꼬마들 양팔을 펼쳐 몇 아름이 넘는 싸리나무 기둥에 마냥

신기해하면서 보물찾기 하던 일이 눈에 선한데.어릴적 지겹도록 느껴졌던 그

절의 옛 모습이 이제 비로소 다만 내 마음 속에 남아 영원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자연을 통째로 사용한 예술 또 하나 거론할 문화유산은 들판의

논배미들이다.욕심 많은 예술가라면 한번쯤은 자연을 통째로 사용해보고

싶은 욕망이 일 것이다.그래서 거기 굵은 선으로 그림도 그리고,대지의 흙을

모아 조형물도 만들고,냇물을 끌어다 대는 장치미술도 만들어보고 혹은

곡식도 기르면서 사시(四時)에 맞추어 다양한 색상의 변화를 일으키고 싶을

것이다.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런 감흥이 솟구친다.

그러나 그 어느 예술인이라도 우리 농촌의 논두렁들이 엮어내고 있는

아름다움을 재현해낼 수 없을 것이다.우선 논은 수백년 우리의 삶이 모두

배어 있다.그 안에서 생명을 걸고 일을 해왔다.자연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때로는 순응하고 혹은 원망하고 그래서 투쟁하면서 현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완만하게 굴곡진 먼 들판의 모습은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린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예술품,바로 그것이다.그 사이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을 가로질러

보(洑)를 쌓고 거기 흐르는 물이 논도랑을 따라 나긋나긋이 흘러가게 한다.그

생명의 물줄기는 미로처럼 얽혀 있으면서도 반드시 규칙과 순서를 어기지

않는다.한평생을 논배미에 의지해 사는 농군의 마음에서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정다운 예술은 그 들녘일 것이다.한편으로 그런 애착을 가질 수

없었던 빈한한 많은 우리 조상들은 서러움 또한 그곳에 쏟아부었을 터이다.

어디도 모나지 않은 논배미는 순한 농군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그러나 그 논은 절대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우리 선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따라 물결같은 논두렁을 그리면서도 중심

바닥만은 공평을 잃지 않은 것이다.들녘을 바라보면서 생존의 고단함을

무심히 달래고,거기 넘실대는 나락을 보면서 생의 의지를 돋우었을 농민을

생각한다.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구나.네가 무슨 반달이냐,초승달이

반달이지.'지금은 경지정리한다고 온통 쓸어서 군대식으로 이런

초승달.반달들을 줄을 세워 정돈시키고 있다.농민들의 노랫가락은 사라져

가고 굉음의 트랙터가 안하무인격으로 덤비고 있다.유형이라 하기엔 너무나

형체가 없는,물질적이라 하기엔 너무나 철학적인 살아있는 공동체의

문화재가 점차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사진설명>

부도와 탑비 쌍봉사 철감선사 사리를 넣은 부도와 탑비.우리나라 최고의

화려하고 우아한 돌로 빚어낸 그 아름다움에서,그 의미의 심오함에서,보는

이를 한없는 신비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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