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정렴정치회고록>12.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자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외국의 내정간섭을 배척하면서 자주성을 확립하는데 외교의 승부를 걸었다.또 국가이익을 제일로 삼고 국제신의를 존중하는 것에도 똑같은 비중을 두었다.자주외교를 이룩하려는 朴대통령이 가장 갈등을 빚은 상대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었다.대선유세 때부터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공약했던 카터대통령은 77년 1월20일 취임하자마자 이를 정책으로 확정했다.그리고 외교대상국의 인권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소위 인권외교를 내걸었다.

朴대통령은 이에 대해 무척 못마땅해 했다.그는“한국사람인 내가 우리 국민의 인권을 더 아끼고 존중하지,외국사람인 미국인이 어째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지극히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79년 6월29일 카터대통령이 서울에 왔다.그때 나는 주일대사로 있었는데 나중에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터대통령은 서울로 날아오면서 朴대통령이 철군(撤軍)문제를 자기에게 직접 거론할 것이란 말을 듣고 몹시 난처한 기분이었다.카터대통령은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면서 도착성명조차 내질 않았고 마중나간 朴대통령과는 악수 하나로 끝냈다.그는 곧장 동두천에 있는 미군기지로 날아가 그곳에서 방한 첫날밤을 보냈다.

드디어 다음날 정상회담이 열렸다.朴대통령은 회담 1주일전부터 혼자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면서 할 얘기를 정리했다.朴대통령은 철군결정이 왜 현명치 못한가를 45분간 논리 정연하게 피력했다는 것이다.

당시 회담에 동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의 회고에 따르면 카터대통령은 몹시 분노했다고 한다.회담후 미 대사관저로 돌아온 카터대통령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차안에서 동승했던 밴스 장관.브라운 국방장관.브레진스키 안보담당특보와 강도높은 토론을 가졌다.브레진스키 특보를 빼고는 모두 철군에 반대했다.이로부터 20일 정도후에 카터대통령은 철군중지로 돌아섰다.세계전략의 측면에서 철군의 위험을 역설한 朴대통령의 반론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94년 7월8일 김일성(金日成)이 사망하기 20여일전에 카터전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났다.그는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은 위대한 지도자이고 북쪽의 인권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82년 11월 카터의 자필회고록이 출간됐다.나는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이던 朴대통령을 추모하면서 철군과 인권문제가 어떻게 서술돼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서둘러 일역판을 구입했다.

상.하 양권 9백40여쪽중 한국에 관한 기술(記述)은 단 네줄뿐이었다.나는 朴대통령과 한국국민의 모습이 너무나도 애절하게 느껴져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朴대통령이 신의를 중시한 대표적인 예는 대만과의 관계다.

72년 유엔에 중국이 정식 가입하고 대만이 축출되자 그때까지 중국과 수교하지 않았던 각국은 앞다퉈 대만과 단교했다.

우리 정부내에서도“그렇게 대만을 고맙게 여기던 일본도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택했다.우리도 대만과의 관계를 격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朴대통령은 생각이 달랐다.그는“장제스(蔣介石)총통이 일제때 우리 임시정부를 도와주었다.특히 해방이후에는 국제무대에서 대만이 우리나라를 적극 지원해 주어 우리가 많은 신세를 졌는데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하여 목전의 소리(小利)를 얻고자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대만 주재 한국대사관은 모든 나라중에 맨 마지막으로 닫을 것이다.한.대만 관계는 격하시키는 일 없이 그대로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은 90년대 초까지 대만이 수교하고 있는 30여개국의 하나로 남아 있다가 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우리나라는 대만과 단교할 때 신의상 대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충분한 배려가 없었으므로 대만은 한국에 대해 현재까지도 섭섭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도 朴대통령은 마찬가지였다.65년 상반기 육군맹호사단을 월남에 보내는 문제를 둘러싸고 국내는 상당히 시끄러웠다.야당은 물론 여당내에서도 반대가 적잖았다.그해 6월9일 파병여부를 결정하는 최종 당정연석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외신기자 출신인 서인석(徐仁錫)의원은“자유진영의 주요국 언론들이 월남파병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거나 비판적이며 전투부대의 파병은 국가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다”며 강하게 반대했다.하지만 朴대통령의 결론은 간단하고 확고했다.“6.25때 우리 대한민국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을 위시한 16개 우방이 자유의 십자군으로 즉각 참전해 주었다.이 신세를 갚기 위해서라도 희생을 각오하고 월남에 출병해야 한다.우리는 남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남에게 신세를 갚을 줄도 아는 신의와 책임을 가진 민족이다.”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이 월남땅에서 피를 흘렸지만 우리는 국제사회에 신의를 지켰다. 정리=김진 기자

<사진설명>

79년 7월 청와대에서 박정희대통령이 방한한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카터의 주한미군 철군정책과 한국인권 비판을 둘러싸고 두 사람은 노골적인 갈등을 빚었다.朴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카터의 정책을 통렬히 비판했으며 카터는 철군을 연기해야 했다. [중앙포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