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미국, 중국,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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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 모두가 국내문제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는 동안 나라밖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외부세계의 움직임에 대해 관심과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할 필요가 있다.

냉전종식 이후 우리는 탈냉전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자주 들어왔다.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분명치 않았다.그런데 드디어 최근 국제정세의 흐름을 보면 탈냉전 세계질서의 윤곽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따라서 탈냉전 질서는 미국의 전략적 구상에 따라 구축되고 있다.그러면 미국의 구상은 어떤 것인가.미국은 냉전시대의 기존 동맹체제를 재확인및 확대발전시킴으로써 미국에 도전했던 세력이 또다시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봉쇄하려 하고 있다.

우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동유럽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러시아는 NATO가 러시아 국경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반대해 왔지만 지난 3월말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옐친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클린턴의 최후통첩에 굴복하고 말았다.러시아는 더이상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옐친은 경제적으로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고 외교적으로도 세계무역기구(WTO).서방선진7개국(G7).아태경제협력체(APEC)등에 참여하려면 미국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형편이다.아시아지역에서도 미국의 전략은 유럽에서와 같은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즉 미국은 냉전이 종식된 상황에서도 미.일안보조약을 재확인하고 미.일동맹의 기초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이것이 클린턴.하시모토 신안보협력선언의 전략적 배경이다.

그러나 아시아는 두가지 면에서 유럽과 다르다.NATO는 다자간 안보동맹이지만 미.일안보조약은 양자간 조약이다.따라서 미.일조약은 확대될 수 없으며,양자조약의 강화는 제3의 국가와의 관계를 오히려 어렵게 만들 수 있다.그러니까 워싱턴이 아무리 한.미동맹과 미.일안보동맹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운영하고 싶어도 실제로 그것은 한.일간의 정치적 현실로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중국은 러시아가 아니다.러시아는 약하지만 중국은 강하다.러시아는

정치.경제.사회의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중국은 지금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랜드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2015년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실질구매력으로 미국의 GDP보다 27% 더 많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그리고 중국의 군사예산은 현재와 같은 추세로 나간다면 2006년부터 미국을 앞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그러니까 중국은 아태(亞太)지역에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석양에 떨어지는 태양이 아니다.미래는 정보기술이

지배한다.정치.경제 뿐만 아니라 전쟁도 정보 테크놀로지가 좌우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그리고 정보기술의 군사응용은 미국의 독점분야다.

따라서 앞으로 상당기간 중국은 미국의 군사패권에는 도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역내의 정치.외교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물론

미국은 중국도 기존질서의 틀 속으로 들어오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미.중간의 경쟁은 불가피하

다.문제는 그러한 갈등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것인가 하는데 있다.

미.중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원인으로는 대만문제와 난사(南沙)군도 분쟁이

있다.미국은 직접 분쟁 당사자는 아니지만 만일 중국이 무력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경우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아태지역의 질서를 방어하는

역할을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

미.중관계에서 한반도문제는 매우 미묘한 위치를 차지한다.왜냐하면 양국은

궁극적으로 경쟁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안정을 필요로 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적인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미.중간의 갈등은 한반도의

통일문제에서부터 시작된

다.통일된 한국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편에 유리한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워싱턴과 베이징(北京) 전략가들에게 중대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우리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미.중관계에 대한 전략구상이 없는 통일논의는 하나의 감상적인

공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경원〈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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