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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청혼의 벽’엔 사랑이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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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청계천을 걸었다. 청계9가 두물다리 아래에 섰을 때 어디서 날아온 불빛이 두 사람을 때렸다. 다리 아래로 떨어지던 폭포 물줄기 위에는 거짓말처럼 두 남녀의 사진이 떴다. 휴 그랜트가 나온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타이틀 음악이 감미롭게 흐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남자는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고,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10월 25일 저녁 회사원 김현욱(32)씨는 그렇게 여자친구 김수빈(28)씨에게 청혼했다. 일주일 뒤면 결혼식을 올릴 두 사람이지만, 결혼을 앞두고 그럴듯한 이벤트 한 번 못해 줘 미안했던 김씨는 그렇게 마음의 짐을 덜었다. 


#2. 50대 후반의 하모씨는 4월의 어느 저녁, 남편을 청계천 두물다리 아래로 이끌었다. 군인인 남편은 명예퇴직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폭포 위 물줄기에 아내가 남편에게 전하는 영상 메시지가 떴다. “여보, 우리 가정을 위해 애써 줘 너무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메시지가 흐르자 남편은 입술을 꽉 물었다. 이벤트는 하씨가 아이디어를 내고, 딸이 동영상을 준비했다. 하씨 모녀는 ‘청혼의 벽’ 홈페이지에 ‘두 번째 청혼’이라는 제목으로 이벤트를 신청했다.

청계천 ‘청혼의 벽’이 탄생한 지 24일로 1년이 됐다. 도시에 낭만과 문화를 심어 보자는 서울시의 ‘천만상상 오아시스’ 프로젝트에 시민 정용화(31)씨가 아이디어를 내 만들어졌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이루듯, 성북천과 정릉천 두 물길이 청계천과 만나는 곳에 조명·무대·워터스크린 등이 갖춰졌다.

1년간 이곳에서 이뤄진 사랑 고백은 모두 119건. 깜짝 이벤트를 선물받은 남성 또는 여성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하트 모양의 버튼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수락’, 또 다른 하나는 ‘거절’이라는 의미다. 낭만적 분위기 덕분일까. 거절 버튼이 눌러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청혼의 벽’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민간 업체 ‘메가온’의 이국범 팀장은 “미혼 커플 중 이곳에서 청혼을 하고 결혼으로 이어진 커플만 30여 쌍에 이른다”고 말했다.

젊은 남녀들의 이벤트 장소로 즐겨 이용되지만 삶에 쫓겨 살가운 고백 한 번 못 했던 중년의 부부가 이른바 ‘앙코르 프러포즈’를 한 경우도 12건이나 된다.

 주변의 편견을 이기고 사랑을 맺은 다문화 가정의 부부 사연도 녹아 있다. 이런 사람들 중 한 명인 김은선(39)씨도 24일 ‘청혼의 벽’ 1주년 행사에서 파키스탄인 남편에게 사랑을 전했다. “남들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며 피했지만 순수한 마음과 눈빛이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6년이 돼 갑니다. 이미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을 다짐합니다.”

‘청혼의 벽’은 홈페이지(propose.seoul.go.kr)에서 이용 신청을 받고 있다. 신청 비용은 무료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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