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국가 성쇠는 도덕과 권력 분산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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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러나 파란만장하기로 따지면 우리 역사만 한 것도 없을 텐데, 우리는 수많은 위기를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에 이번의 위기도 결국 이겨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그 위기 뒤에 숨어있는 교훈을 읽어내는 지혜일 것이다. 이번의 경제위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던져주고 있을까.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들여다 보면 재미있는 점이 관찰된다. 보통의 국가가 강대국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맨 먼저 경제력이 성장하고 그에 힘입어 군사력이 증강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경제력 성장을 지탱시켜 주는 건실한 도덕적인 힘이 그 사회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도덕적 힘이 약해지면 경제도 무너져 쇠퇴의 과정을 겪게 된다.

역사가들은 로마제국의 멸망도 제국을 지탱해 주던 도덕적 힘이 쇠퇴한 것에서 원인을 찾는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네덜란드의 번영 뒤에는 목숨을 걸고 신용을 지켜온 상업가 정신이 있었다. 대영제국 쇠퇴의 한 원인은 1870년대까지 영국의 산업사회를 지탱해 주던 건실한 기업가 정신이 약화되고 쉽게 돈벌기를 좋아한 결과, 영국 경제가 돈놀이 경제(rentier economy)로 전락한 것에서 찾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미국은 이번 경제위기가 지나가면 더 이상 패권국이 아니라 여러 강국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패권국 미국의 쇠퇴가 온다면 그 원인 또한 도덕적 타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규정을 무시하고 엉터리 평가를 한 신용평가회사들, 천문학적 숫자의 연봉을 받고 있는 망해 가는 기업의 경영자들, 희대의 다단계 사기극으로 드러난 전 나스닥증권거래소 이사장 메이도프의 행태, 이 모든 것은 패권국 미국의 경제 번영을 지탱해준 도덕적 힘의 약화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에게 미국민의 기대가 그처럼 큰 이유는 미국 기성 정치의 타락에 물들지 않은 그가 미국 사회의 도덕적 타락까지 막아줄 것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힘의 붕괴가 결국은 타락과 부패를 초래할 가능성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수많은 과거의 정치철학자들, 그리고 미국을 건국한 청교도 이주민의 후예들은 권력을 분산시키고, 이로써 모든 기관과 경제 행위자들이 상호 견제하고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미국 헌법과 제도도, 금융거래를 감독할 수많은 장치도 모두 그러한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제도적 장치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가 촉발된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 성공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힘, 그리고 견제와 감시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성공적 작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는 미국 같은 강대국만이 아니라 한국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어디쯤 와있는 것일까.

먼저 우리의 건전한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지탱해 주는 도덕적 힘은 과연 얼마나 강한 것일까. 우리 사회의 도덕적 권위는 어디서 오고, 지도자는 있는가. 사랑과 자비를 주장하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극빈층, 탈북민,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과연 넉넉하게 품어 안고 있는가. 혹시 자유시장의 논리 아래 탐욕과 비리의 소지가 용인되지는 않았는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힘이 약하다면 제도라도 잘 작동시켜야 한다. 우리의 제도는 과연 권력 분산과 견제 감시의 원리를 잘 구현하고 있는가. 10년 전 IMF 위기를 보면서 필자는 21세기 한국 정치·경제는 권력 분산과 견제 메커니즘을 강화해야만 민주주의와 건전한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과연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가. 위기의 한 해를 보내며 한국이 나아갈 미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우리 모두 차분하게 짚어보아야 할 질문들이다.

윤영관 서울대·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