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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타나모 고문이 ‘존경받지 못하는 패권’ 만들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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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22면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한 장면. 테러 용의자로 몰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한 아랍계 영국 청년들의 실화를 다뤘다. 감독은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탔지만 미국의 도덕적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중앙포토

2002년 64%, 2006년 37%. 영국 여론조사 기관인 TNS가 유럽인에게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대한 지지도’를 물은 결과다. 급격한 추락이다. 갤럽이 4월 실시한 조사에선 그보다 더 낮은 22%로 나왔다.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자리한 도덕적 권위의 현주소를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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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지 못하는 ‘수퍼파워’ 미국의 모습은 2001년 9·11 테러와 함께 시작됐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수행한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과정에서 생긴 상처 때문이었다. 미국이 자랑하는 인권과 민주주의란 가치는 더 이상 강요할 수 없게 됐다. 국제 사회에서 미국은 ‘독불장군’ ‘패권국’으로 불렸다. 심지어 일부 현안에 대해 미국은 국제 사회의 노력을 깔아뭉개는 일도 있었다.

도덕적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은 대표적 사례는 미국이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행한 초법적 인권유린과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교토(京都)의정서를 묵살한 사건이다. 아프간 내 아브그레이브 수용소에서의 포로 고문, 유럽 내 미 중앙정보국(CIA) 비밀수용소 운영, 국제형사재판소(ICC) 협약과 포괄적 핵실험금지협약(CTBT)에 대한 비준 거부도 비난을 받았다.

“관타나모는 미국의 법 질서 훼손을 넘어 미국 자체를 손상시킨 상징이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저 코언의 말이다. 전문가들은 내년 1월 취임할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상처받은 미국의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해 가장 먼저 취할 조치가 관타나모 폐쇄라고 주장한다. 17일 타임지는 오바마가 대선 공약이었던 관타나모 폐쇄를 재차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관타나모의 실체는 아직 미궁 속에 빠져 있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국방부 자료를 인용해 2002년 1월 이후 779명이 구금돼 그중 520명이 본국 등으로 이송됐으며 현재 250여 명이 수용돼 있다고 보도했다. 779명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23명에 불과했다. 5명은 구금 중 사망했다. 수년간 억류됐다 풀려난 이들에 대해 미 정부는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 ‘법적 증거’가 아닌 ‘정보사항’을 담은 서류 한 장으로 그들의 삶은 비참하게 구겨졌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HRW)는 “미국은 관타나모를 통해 더 이상 인권 가치를 선도할 역량이 없음이 확인됐다”며 “이제 유럽연합(EU)이 이를 주도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지구촌 차원의 새로운 도전인 기후변화도 마찬가지다. 부시 행정부는 유엔 기후협약에 따라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한 교토의정서에서 2001년 탈퇴했다. 중국· 인도와 같은 개도국들의 배출 규제가 없다는 게 거부 명분이었다. 미국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25%를 뿜어 낸다. 유사 이래 최대 배출국이다. 국내의 한 환경 전문가는 “부시 행정부의 기후변화에 대한 입장은 EU 시각에서 보면 경멸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로 들어설 오바마 행정부는 지구온난화 대책에 적극적이다. 최근 폴란드 포즈난에서 열린 제14차 유엔 기후변화 총회에서 미국 대표단은 ‘너희(중국·인도를 뜻함)가 안 하면 우리도 안 한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가 할 테니 너희도 해라’는 자세로 바뀌었다.

이번 총회에 참석한 외교통상부 정래권 기후변화 대사는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내정된 존 케리 의원과 15명의 의원 보좌관이 회의에 참석해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의견을 청취해 가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말했다. 정 대사는 “미국이 내년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전향적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하나 솔선수범의 지도력을 보일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차세대 파워로 주목받고 있는 중국과 인도의 위상은 어떨까. 미국의 리더십이 추락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인도 등 신흥국들이 경제력이 도약한 만큼 글로벌 리더십을 신장시킨 것은 아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지난 2년간 인권 탄압국인 미얀마·짐바브웨 정부에 대한 제재 결의안이 나올 때마다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수단 정부를 지원하고 인권을 짓밟는 미얀마에 무기를 판매해 왔다. 에너지와 자원, 안보전략 등을 감안한 실리 외교 때문이다. 특히 티베트 시위를 유혈 진압하고 인권탄압 사건이 빈발해 국제 사회의 표적이 되고 있다.

갤럽이 4월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은 경제원조와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동남아를 빼고는 다른 지역에서 글로벌 리더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미래'를 쓴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 추아 예일대 교수는 “성공한 제국은 다원주의와 관용 정신을 갖춰야 하는데 인구 13억 명의 중국은 민족주의에 갇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도 역시 극심한 빈부격차와 계층갈등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처지다. EU는 지역적·물리적 통합을 이루고 미국에 맞먹는 경제력을 갖췄지만 정치적 통합은 아직 요원하다.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리더십은 개인 관계와 마찬가지로 존경심을 토대로 한다. 자신이 가진 힘을 합법적으로 행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시키는 데 필수조건이다. 영국문화원은 1월 유럽인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지지율은 낮았지만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미국의 정권교체 이후 대미 관계가 다시 긴밀해지기를 희망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리더십이 복원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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