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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노블레스 오블리지와 왕자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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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 우리는 국가현황이 총체적으로 위기이고 분야별로 보더라도 어디 한군데 희망을 걸만한 구석이 안 보여 걱정스럽고 불안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큰 일 난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정신차려 뛰자고 한다.그러나 국민들은 배가 부르기도 하고 그동안 천부당만부당한 각종 의혹및 사태에 하도 기가 막혀 그러한 호소를 옛날만큼 절박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정부는 별 처방도,실행도 없는 듯하다.

이러한 난국과 위기를 극복함에는 너와 내가 있을 수 없지만,특히 고통분담에 솔선수범할 사람은 정부와 지도층이다.정부는 지금 10% 비용절감이니,2조원 삭감 등을 내세우지만 획일적으로 업무추진비 등을 다소 줄이고 임시 기능직 몇자리를 보충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고통분담이 안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부작용과 냉소적 태도만 조장할 뿐이다.아주 과감한 예산삭감,정부부처 통폐합과 공무원 감원,그리고 민영화만이 적절한 방법이다.무슨 장관급이 그리 많으며 한시적으로

출발한 대통령위원회 등이 자리를 틀고 앉아 해당부처를 얼마나 혼란시키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유엔은 1천개 이상의 행정직을 감축하고 호주 정부는 심지어 정부부처도 곧 민영화할 계획이다.정부부처는 최소한의 고유업무와 정책업무만 수행하고 나머지 업무는 과감히 민간에 넘기면서 그 업무를 수행하던정부조직을 해체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규제혁파를 위한 근원적 방법이기도 하다.우리나라에서는 정권말기에 실현불가능하다고 지레 단념할지 모르나 우선 청와대부터 윗자리의 수를 줄이고 직급을 낮추어야 하며 대통령위원회들을 폐지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사회지도층이 고통을 분담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30여년전 아랍과 이스라엘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에 유학중인 아랍학생은 도피하는데 이스라엘 학생들은 즉각 참전하러 귀국보따리를 쌌던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그야말로 서구사회에서 고위직이나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전통적으로 배우고 지켜온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sse Oblge)를 실천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부 정치인.기업인.공무원.교수.법조인 등이 지난 4년간

대통령 차남에게 줄을 대 감투를 쓰거나 이권을 얻은 행태와 비교해보면

실로 극과 극의 차이가 있다.귀족제도가 없는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지란 문제의 차남을 포함한 대통령의 가족은 물론 고위공직자나 사회지도층들이 일상생활에서나 임무수행에 있어 철저한 공인의식을 가지고 명예롭거나 관대한 행위를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나 할까.그런데 권력을 잡으면 이를 휘두르게 되고,그에 따라 돈이 생

기는가 하면 명예박사나 훈장,기타 온갖 영예가 따라오고,심지어

주색에까지 탐닉하는 수가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세도를 잃은 후의 비정함은 모르지 않으련만 아마도 그런 환상 때문에

모두들 권력 주변에 파리떼처럼 모여드는 것이 아닐까.그래서 요즈음도

하고 많은 날 생업을 팽개치다시피 한채 다음 대권의 향방을 탐색하는

것일까.

대통령의 차남은 선거로 획득한 부친의 막중한 직책 때문에 노블레스

오블리지가 엄격하게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일종의 왕자병에 걸려 그동안의 행동이 국정문란형 인사및 이권개입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됐으니 앞으로 국

회와 검찰의 조사가 TV에 방영돼 하나씩 의혹이 벗겨질 때마다 국민들은

얼마나 허탈하고 황당해 할까.

그러나 국민들이 부당한 권력추구적 의식구조와 행태를 고치지 않고는

대통령이나 그 가족의 황제병.왕자병은 앞으로도 계속 복제될 가능성이

높고 정치자금법이나 선거법만을 고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인다.따라서 의식구조개혁과 정치관계법의 개정 외에도 권력남용자와 그에 따른 수혜자를 집요하게 수사하고 엄하게 벌하는 법집행이 요구된다.

한보사태와 김현철(金賢哲)의혹의 경우부터 범죄구성요건이 안된다는

등,증거가 없다는 등 형식논리를 내세우지 말고 하다못해 행정적

불이익이나 윤리적 비난 등을 통해서라도 국민이 납득할만큼

단죄(斷罪)하는 한편 부당한 지위나 이권을 받

은 자는 그보다 몇배의 실질적 불이익을 줘 재발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송상현〈서울大 법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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