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서정에도 세대차는 뚜렷 - 젊은 시인들의 賞春詩 '속수무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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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노래하지 않아도 봄이 온다/겨우내 버틴 가지들이 부러지고/무너지는 축대 위로 쏟아져 내리는/저 찬란한 햇살 속/새들은 나뭇가지 물어다 집을 짓고/노인들은 말없이 임종을 기다린다/노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젊은 시인들의 상춘(賞春)시들이 수상하다.최근 나온 문예지 봄호나 3월호에 70대 원로에서 20대 신인에 이르는 시인들이 계절에 맞춰 봄에 대한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앞 시는 젊은 시인 이태희(34)씨가'동서문학'봄호에 발표한 시

'봄 무사(無事)'전문이다.젊은 시인들은 이제 감흥에 겨워 봄을 노래하지 않으려 한다.터진 나뭇가지 사이 새순에서 신생과 재생을 보지 않으려 하고'임종'을 보려 한다.찬란한 봄볕 속에 새 집을 짓고 있는 까치며 참새,움터오르는 나무

등등….그러나'노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며 자연의 순환에 나몰라라 하는 자세다.

'저 새순과 햇잎들이 나와 더불어서/영원 속의 바로 이 시간을 차지하여/무한 속의 바로 이 공간을 차지하여/이렇듯 서로가 마주한다는 사실부터가/신비의 실체를 또렷이 보여줄 뿐 아니라/만물의 생성과 소멸과 부활로 이어지는/불멸의 종국

적 완성을 증거하고 있다.'

원로시인 구상(78)씨가'현대시'3월호에 발표한'새순과 햇잎'한 부분이다.구시인의 예의 시처럼 설명적인 이 시가 우리 기존 시들의 봄에 대한 감흥을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생성과 소멸과 부활로 이어지는 순환론적 세계관의 실체를

봄은 매번 신비스럽게 증거하고 있다.어김없는 자연의 순환론적 고리에 인간 자신도 의심없이 안겼다.

'내 등꽃 필 때 비로소 그대 만나/벙그는 꽃봉오리 속에 누워 설핏 풋잠 들었다/지는 꽃비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면/어깨에서 가슴께로/선명하게 무늬진 꽃자국 무심코 본다/달디달았던 보랏빛 침잠,짧았던 사랑/업을 얻고 업을 배고 업을

낳아서/내 한겹 날개마저 분분한 낙화 져내리면/환하게 아픈 땡볕 여름 알몸으로 건너가느니.'

'실천문학'봄호에 발표된 김명인(51)씨의'등꽃'전문이다.이 시에서도 봄은'달디달았던 침잠과 사랑'이 있는 낙원이다.설핏 든'풋잠'이든,'짧았던 사랑'이든 봄.낙원 속의 그것들은 시공을 초월한다.그러나 꽃이 지면 '꽃자국'만 환하게

아픈 업으로 남는다.그래 이제 봄,자연에서 멀어진 현대인의'실락원의 설화'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0,30대 시인들에게는 봄,그'꽃자국'에 대한 희미한 기억마저도 없다.

'내 자전거에는 지붕이 없고 유리창이 없다/지붕도 유리창도 없어서/나는 봄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이다/봄은 너무 촘촘해 젖지도 않고 발을 묶는다/목련의 흰색이 너무 사납다/이 봄 다 당하면 나를 망치리/눈부신 접전의 골목,/지붕도 유리

창도 없이 자전거가 간다.'

심창만(36)씨가'문학동네'봄호에 발표한'봄을 지나다'한 부분이다.'봄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이라는 진술이 젊은이답게 너무 솔직담백하다.지붕도,유리창도 없이 자전거같이 달려가는 봄의 맨몸,봄의 정령을 잡으려 해도 도저히 시로 담아낼

수 없다.현대인들은 이제 자연,자연의 주기로부터 기약도 없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왔던가.

'아이스크림을 입술로 핥으며 서로의 입술을/아이스크림으로 핥아 먹으며 연인들이 지나간다/발작적으로 웃으며 경쾌하게 봄밤이 흔들거린다/누구지?봄날 저녁에 풍경처럼 나타났다가/가뭇없이 사라져가는 우리,우리는 누구지?'

'시와 시학'봄호에 발표한 '봄날은 간다'에서 권현형(32)씨는'우리는 누구지?'라고 묻고 있다.한없이 경쾌하고 발랄한 신세대 의식 저 너머에서 깊은 슬픔이 새어나오고 있다.

도대체 이 좋은 봄날에 편승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젊음의 고뇌를 가식없이 드러내보여주고 있으니.순환과 소생을 알리는 봄이 젊은 시인들에게는 싫다.젖빛,혹은 순결로 상징되던 목련꽃 색깔도'사납다'하고 보드랍고 그윽한

봄밤도'발작적'이라 한다.봄을 맞는 시에도 세대의 단절이 있다.이 단절은 곧 아스팔트 신세대들의 자연의 순환과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젊은 시인들의 상춘시가 수상하다.도시문명 속에서 태어나 처음부터

자연의 주기를 잊은 듯 시에서도'속수무책의 봄'을 그리고 있다.그림은

이철수씨의 95년도 판화'좌탈(坐脫)'(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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