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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위기 속에서 싹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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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래서일까. 모두가 움츠러들기만 한다. 촛불에 주눅든 정부는 매사에 자신이 없다. 불이 서까래로 옮겨 붙고 있는데도 아직 기왓장을 뜯어내고 물을 뿌려야 할지 말지 결단을 못 내렸다. 한국은행 총재는 “비상조치를 취해야 하는 심각한 위기는 아니지만 그 언저리에는 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지 헷갈리기만 한다. 은행도 대기업도 현금만 신주 모시듯 움켜쥐고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그럴수록 가계는 지갑을 더 꼭꼭 닫는다. 정부도, 기업도, 가계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중압감에 잔뜩 풀죽은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기회는 늘 위기 속에서 잉태했다.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미국 자동차 시장이 일본 자동차에 무너진 건 1970년대 1차 오일쇼크 때다. 천정부지로 뛴 기름 값이 큰 차만 타던 미국 소비자의 마음을 작고 연비 좋은 일본 차로 돌려놓았다. 한국 조선업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선 것도 2차 오일쇼크라는 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일쇼크에 겁먹은 일본 회사들이 설비투자를 망설이는 사이 한국 회사들이 초대형 조선소를 잇따라 지어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았다. 미국 애플은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던 2001년 ‘아이팟’이라는 신제품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남들이 다 도망갈 때 공격을 감행한 역발상이 MP3 시장을 석권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기회는 있다. 미국은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다. 그런데 미국의 ‘빅3’ 자동차 회사가 벼랑 끝에 섰다. 당장은 한국 자동차 회사도 어려울지 모르지만 판이 흔들릴 때가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찬스가 될 수도 있다. 한국과 대만·독일 반도체 회사가 벌이고 있는 반도체 값 깎기 경쟁의 승자도 한국 회사가 될 공산이 크다. 이미 대만과 독일 회사는 현금이 바닥나기 직전이다. 조선산업 불황도 한국 조선 회사에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선 가장 껄끄러운 잠재 경쟁자인 중국이 미처 조선산업을 키우기 전에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일으키고 있는 ‘그린 에너지’ 붐은 우리에게 새 시장을 열어줄지 모른다. 현재 기술로 가장 효율적인 청정 에너지원은 원자력 발전이다. 그런데 최근 30년 사이 원자력발전소 건설 경험을 가장 많이 쌓은 나라는 한국이다.

위기 속에 기회는 싹트고 있다. 그러나 기회라는 감은 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다고 저절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 일본 오사카 만에선 샤프·소니·파나소닉의 디스플레이 및 리튬이온 배터리 공장 건설이 한창이다. 90년대 ‘잃어버린 10년’ 동안 투자를 소홀히 했다가 한국·대만 회사에 시장을 빼앗긴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인수합병(M&A)으로 남이 키운 과실 따먹기에만 열중해선 한국 기업의 미래는 어둡다. 미국 빅3 자동차 노조는 우리 노조의 반면교사다. 강력한 노조 힘만 믿고 눈앞의 이익만 좇다 정작 위기 뒤에 찾아올 더 큰 기회는 날리게 생겼다. 이젠 정부도 자신감을 보여라. 돈을 풀 때는 화끈하게, 수술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 정부를 믿는다. 지금은 비록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새벽은 꼭 온다. 그때 누가 웃을지는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정경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