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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세기를찾아서>8. 터키 사마춤과 카파도키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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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터키 중부지역 아나톨리아에 있는 코냐는 노아의 홍수가 지나간 다음 가장 먼저 생긴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이 고도를 찾아온 이유는 이곳이 사마춤(Sama Dance)의 고장이기 때문입니다. 터키인들은 이 사마춤의 세계가 그들의 정신적 저변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마춤은 단소와 북장단에 맞추어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다른 한 손은 땅을 향한 채 회전(自轉)하면서 원운동(公轉)을 하는 매우 단순한 형식입니다. 3시간이상 계속되는 2중 3중의 끊임없는 원운동을 통하여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고 이러한 몰아의 체험을 통하여 알라에게 자신을 일치시켜나가는 춤입니다. 나는 알라라는 최고의 가치가 원운동의 반복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형식을 통하여 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감명 깊었습니다.

사마춤은 이슬람 신비주의로 알려진 수피사상(Sufism)에서 발전한 민중적인 이슬람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단이 난해한 문자를 권위의 장벽으로 삼아 현학적이고 율법적인 것으로 교조화되자 이제는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직접 알라에게 다가가려는 운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불교에서 선종이 교종을 대체하게 되는 배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운동을 이끈 사람이 철학자이며 시인인 메블랴나 잘랄레딘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였으며 이곳이 메블랴나 종단의 본고장입니다. 메블랴나박물관에는 루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그가 제자들을 길러내고 수행하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냐에서 사마춤을 직접 찾아볼 수 있는 기회는 결국 갖지 못하였습니다.

춤을 출줄도 모르면서 사마춤을 찾아가는 나를 당신은 매우 의아해하였습니다만 그러나 내가 보고자 한 것은 춤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 ‘개인과 사회'라는 20세기를 통하여 끊임없이 추구되었던 철학적 주제였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자료를 통하여 접할 수 있었던 사마춤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주제를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사마춤에서는 춤이라는 운동성과 원이라는 정지성이 구도(求道)와 명상(瞑想)이라는 정신적 대칭점을 얻고 있음으로써 동(動)과 정(靜)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사람의 자전이 소원(小圓)의 공전궤도에 통합되고, 소원의 자전이 대원(大圓)의 공전 속으로 통합되어가는 중층적 원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조화시키는 소박한 민중적 형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자신이 원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더 큰 원의 호(弧)를 그리고 있는 사마춤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몰아나 무아(無我)의 경지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높은 수준의 일체감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개인이 전체속에 해소됨으로써 도달하는 일체감이 아니라 그러한 일체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확장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파도키아의 유적에서도 사마춤에서 볼 수 있었던 주제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카파도키아에서는 춤이라는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의 온종일을 자동차로 달려야 했던 터키 내륙지방의 삭막한 벌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난 카파도키아는 황무지와 다름없었습니다. 석회석 대지와 화산재로 이루어진 지층이 오랜 풍화와 침식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을 대하자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기에 앞서 그 삭막함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위르귀프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삭막한 석회석 산에 동굴을 파고 살아왔던 수많은 동굴 주거지가 남아 있으며 카이말리에는 아예 땅속에 만든 개미집과 같은 지하도시가 건설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잊혀진 땅이었습니다. 알렉산더왕도, 로마도, 비잔틴도, 셀주크터키에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살 수 없어 버려진 땅이 어느덧 쫓겨온 사람들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괴뢰메에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와 동굴을 파서 만든 교회가 있습니다. 작은 동굴교회의 석벽에 남아 있는 프레스코 성화는 이곳이 과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의 교회였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구(祈求)하였던 정신의 순결은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사마춤의 세계와 카파도키아의 삶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삭막한 터키 중부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문득 문득 당신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이슬람 모스크의 첨탑에서 울려오는 코란의 낭송은 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경종이라던 당신의 말이었습니다. 죄를 짓고나서 죄사함을 기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연에 방지하게 하는 예방의 소리라 하였습니다. 예방의학이 의학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후에 죄사함을 기도하기보다 사전에 죄의 예방을 기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이든 예술이든 최고의 깨달음을 삶의 바깥에 둔다는 것은 그것을 삶속에, 삶 그 자체로서 지니고 있는 것만 못한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마춤이 추구해온 나와 우리의 일체감, 그리고 카파도키아의 가난이 키워낸 정신의 고결함이 곧 소리없는 코란의 낭송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 맥박처럼 우리를 끊임없이 지탱해주는 무언(無言)의 경종이기 때문입니다.

메블랴나 루미가 거처하던 집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가르침(Dyorki)이 적혀 있었습니다.

‘알라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그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함께(Beraber)가 아니다.부자가 되지 말라. 꾀를 부려 세상을 살아가지 말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인의 말은 성인만이 알 수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요구였습니다.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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