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지금 필요한 건 정치 대통령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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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경제를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지금의 경제위기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심각한 것은 100% 확실해 보인다. 10년 전 위기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부 국가의 문제였다. 미국과 유럽 등 다른 지역은 멀쩡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원-달러 환율이 폭등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원화 가치 폭락으로 국내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이 크게 향상돼 단박에 기록적인 무역흑자를 낼 수 있었고, 그 덕에 IMF에서 빌린 돈을 만기가 되기 전에 다 갚을 수 있었다. 세계 경제가 잘 굴러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심각한 동반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선진국권은 이미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고, 신흥 경제권의 성장률도 급속히 둔화되고 있다. 헐값에 물건을 내놓아도 팔 데가 없는 상황이다. 수출 증가세는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대외의존도가 70%나 되는 한국 경제는 수출을 해야만 굴러갈 수 있는 구조다.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내수 부양으로는 한계가 있다.

경제 대통령 아니라 ‘경제의 신(神)’이 나선다 해도 세계 경제가 호전되기 전에는 위기 탈출이 어렵다. 우리가 발버둥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이 밝힌 ‘신(新)뉴딜’ 정책이 하루 빨리 효과를 내서 미 경제와 세계 경제가 살아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한국 경제의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버티는 수밖에 없다. 서바이벌 게임이다. 한국호(號)가 요동칠 때마다 무더기로 떨어져 나가는 낙오자들을 감싸 안고, 경제가 살아났을 때에 대비한 기초체력을 기르면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이 위기는 대통령이 아무리 경제를 잘 알고, 경제 관료가 아무리 유능해도 돌려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경제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 대통령이 아니다. 정치 대통령이다.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그들의 하소연에 귀 기울여 주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그런 대통령이 필요하다.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모든 국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넓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정치 대통령이 필요한 것이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구명보트에 먼저 태우는 것은 노약자와 여성이다. 그것이 정의고, 인륜(人倫)이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에 가장 취약한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 실업자, 파견직, 비정규직에게 구명보트의 자리를 내주고, 구명조끼를 입혀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의 침몰을 막는 길이다.

수출용 중소기업을 하는 내 친구는 10월 이후 한 건의 주문도 못 받았다. 일단은 그동안 벌어놓은 것으로 버티고, 다음엔 임금을 깎고, 비용을 줄여서라도 어떻게든 직원들을 끌어안고 버틸 작정이란다. 둘이 먹을 것을 셋이 나누고, 셋이 먹을 것을 다섯이 쪼개서라도 해고 없이 버티겠다는 것이다.

난국을 헤쳐 나가고, 미래에 대비하자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공기업 개혁이 아무리 사회적 컨센서스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무조건 인력을 10%씩 줄이라는 것은 너무 야박하다. 퇴출 인력을 최소화하면서 임금 삭감 등 다른 방법으로 경영 효율화를 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종부세가 아무리 잘못된 세금이더라도 서민들이 비명을 지르는 마당에 ‘부자 감세’ 소리를 들어가며 꼭 지금 고쳐야 하는가. 전 정권 측근들의 비리를 이 잡듯 뒤지는 것이 지금 그리도 시급한 일일까.

이명박 대통령이 어제 각계 원로를 만났다. 지난주에는 가락시장을 찾았다. 더 나아가야 한다. 전두환에서 노무현까지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모여 위기 앞에서 똘똘 뭉치는 모습은 왜 못 보여주는가. 시장의 신뢰를 받는 인재에게 경제를 맡기고, 대통령은 정치에 전념하라. 그것이 국민의 마음과 가슴에 다가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