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메카 테헤란로는 지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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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한파로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본격적 겨울 추위로 더욱 얼어붙고 있다. 안팎으로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안 좋은 것들뿐이다. 올해보다 더 안 좋다는 내년을 대비해 기업과 근로자·자영업자 모두 긴장의 끈을 단단히 조이고 있다. 한국 경제의 최첨단이라는 서울 테헤란로(강남역 사거리~삼성역 사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업의 금고에서 월급 봉투로, 다시 음식점과 술집의 금전출납기로 이어지는 돈의 흐름이 끊기고 있었다. 비교적 건실한 회사들이 몰려 있어 구조조정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작은 데도 그랬다. 전날 비가 내린 뒤 기온이 급강하한 5일 삼성타운이 있는 강남역에서 무역센터가 있는 삼성역까지 2㎞ 남짓한 거리의 풍경을 중앙SUNDAY가 살펴봤다.

5일 낮 12시 현대백화점 강남점 뒤에 있는 세븐럭카지노 5층 구내식당. 외국계 광고대행사 사장 김모씨가 친구인 인근 국민은행 지점장을 우연히 만났다. 각자 직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가 눈길이 마주친 것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바빠서 같이 밥 먹을 시간이 없다”며 두 사람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분위기는 썰렁했다. 상대방 직원들의 눈길 속에 ‘우리만 어려운 게 아니네’란 열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구내식당을 나서기 전 안면이 있는 CEO를 만난 김 사장은 또 한번 어색한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비슷한 시각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의 한 회전초밥집. 11시40분에 들어온 첫 손님 둘이 식사를 마친 12시20분까지 새로 들어온 손님은 달랑 세 명뿐이었다. 손님보다 많은 일곱 명의 종업원은 서빙을 하면서도 자꾸만 텅 빈 입구를 돌아봤다. 종업원 강모씨는 “손님들이 갑자기 우주로 날아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이날 테헤란로를 걷는 사람들은 평소에 견줘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다고 직장인들이 강씨의 말처럼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회사 건물 안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을 뿐이다. 한국BMS제약 박희정 팀장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거나 부서 단위로 외부에서 도시락·샌드위치 등을 시켜 먹는 회사가 많아졌다”고 전했다.

압구정동의 작은 화장품 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 이혜경(30)씨는 지난달부터 아예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닌다. 점심 값 5000원을 아끼기 위해서다. 처음엔 이씨 혼자였지만 두어 달 만에 동료 두 명이 늘어 회의실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한다. 동국제강 김선홍 과장은 “삼성·포스코·GS 등 어떤 위기가 와도 끄떡없을 회사들이 줄줄이 자리잡고 있지만 외환위기의 악몽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일단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남편과 함께 철강회사에 다니는 홍모씨는 “불경기 덕분에 지름신을 물리쳤다”고 자랑(?)했다. 한 달에 두세 번씩 인근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며 직장생활과 육아 스트레스를 날리던 일을 두 달 전부터 그만뒀다는 것이다. 직장인 강희연(28)씨는 백화점에서 할인점으로 쇼핑 장소를 바꿨다가 기름값이 더 드는 것 같아 며칠 전부터 동네 수퍼에 다니기 시작했다. ‘견물생심’의 유혹에 시달릴까 봐 아예 거리에 나서지 않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고급과 서민 음식점을 가리지 않고 힘든 이유다.

포스코 인근의 한 일식집은 매출 감소를 견디다 못해 1인당 12만원인 저녁 메뉴를 6만원으로 인하했지만 여전히 손님이 없다. 강남역 인근의 일식집도 12만원짜리를 4만원으로 내리고 소주와 맥주를 무료로 제공한다며 단골손님들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 선릉역 인근의 한 호프집은 6월부터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점심 웰빙 뷔페 3900원’이란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과금이라도 벌충하고 싶은 생각에서였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테헤란로 뒷골목에 있는 한식집 월정은 1만5000원짜리 특정식을 1만원으로 내리고 불고기 리필 서비스도 시작했다. 지난달엔 개점 1주년 명목으로 소주 1병을 100원에 팔기도 했지만 손님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사찰음식 전문점 수릿골의 이기나 대표는 “접대나 모임 행사가 말도 못할 정도로 줄었다. 지난해에도 적자를 봤는데 올해는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자영업자라고 앉아서 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변 음식점들의 눈총을 감수하고 점심 장사를 시작하는 술집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다.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 난방 온도를 낮췄다가 손님에게 타박을 받는 옷가게도 생겨나고 있다. 지하철 선릉역 입구엔 평소 두세 명이 광고 전단을 돌렸지만 요즘엔 예닐곱 명으로 늘었다. 인근 술집과 대부업체에 음식점까지 가세했기 때문이다.

불경기는 사람들을 작은 차이에도 민감하게 만들었다. 테헤란로에 밀집해 있는 금융회사들이 이를 특히 많이 느낀다. 상반기만 해도 사람이 북적이던 증권사와 은행은 손님이 절반 이상 줄었다. 하나은행 안모 지점장은 “펀드나 적금을 깨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새로 드는 사람도 전무하다시피 하다”며 “항의도 거의 없는 걸 보면 사람들이 그동안의 손실을 그냥 잊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지역 은행 지점들에선 최근 우량 건설·철강사들이 그동안 쓰지 않던 당좌한도를 찾아 쓰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상호저축은행들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낫다. 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좇아 고객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김정화(37)씨는 “지난주 적금을 들러 저축은행에 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1시간 기다렸다”고 말했다.

반갑지 않은 편리함도 불쑥불쑥 나타난다. 회사원 조호건(39)씨는 4일 오후 7시쯤 목동 집으로 가기 위해 강남역 네거리에서 택시를 탔다. 올림픽대로가 공사 중이었는데도 귀가하는 데 26분이 걸렸다. 조씨는 “길도 안 막히고 택시도 잘 잡히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끼니 때 유명 음식점, 식후 커피 전문점에 길게 늘어선 줄도 사라졌다. ‘4000원 이상씩 하는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시느니 그 돈으로 옷 한 벌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얼마 전 예쁜 커피잔을 새로 장만한 김승희(32)씨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다. 점심 시간이면 바쁘게 숫자를 토해 내던 은행 지점의 대기번호 발행기도 한가해졌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자가용 대신 버스와 지하철·도보로 출퇴근 하는 ‘BMW(Bus·Metro·Walking)족’이 많아졌다. 현대백화점 하지성 대리는 지난달부터 경기도 수지 집에서 회사까지 1시간10분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자출족’이 됐다. 대기업 직원 성상진(39)씨는 줄어든 회식 시간을 중국어 학원에서 보낸다. 직장인 사이에선 한 가지 술로 1차를 9시 전에 끝내는 ‘119회식’이 보편화하고 있다.

외국어대 임기영(경제학) 교수는 “과도한 거품이 과도한 위축이라는 반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국면”이라며 “정부의 자금 지원과 구조조정이 국민이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신속히 이뤄져 미래에 대한 불안감부터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현철·박혜민 기자 [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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