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트레인스포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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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는 세기초의 환상을 몰고 왔지만 대니 보일의 기차는 세기말 청춘의 절망을 몰고 왔다.절망은 다음 두가지에 근거한다.

첫째 전망없는 스코틀랜드 젊은이라는 출신 성분,둘째 냉장고.TV.자동차.의료보험등 이유를 모르면서도 마땅히 원해야 한다고 강요되는 인생.그러나 감독은 60년대식 도전을 택하는 대신 90년대의 자폐적인 환상과 환멸을 선택했다.때문에

주인공들은 민족적 울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도 없다.사물화한 세태에 대한 풍자도,현실에 대한 예리한 진단도,상실에 대한 아쉬움도,집착도,비장함도,그 어떤 순결성도,심지어 냉소조차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다.스크린은

지난 시대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른 식으로 절망을 늘어놓는다.

카메라는 인물을 어떻게 전시하는가.벡비.식보이.스퍼드.토미.랜튼이 골목길을'질주하고',어슬렁거리며'걷고',방구석에 처박혀'눕고',껄렁대면서 술집에'앉는'몸짓에 나는 주목한다.

아무리 뛰고,섹스하고,마약을 하더라도 그들의 삶은 갇혀있다.꿈까지도.

이들은 모두 외따로 떨어져 있다.그러나 이건 고독이 아니라 무료.무의미다.랜튼 주위에 포진한 친구의 모습을 보라.미치광이 폭력배.야바위꾼.바보.친구도 왕년의 영화가 선보였던 그런 친구가 아니다.대니 보일의 영화에서 우정을 이야기하

는 것은 난센스다.내 안에 있는 지옥은 그러니까 바깥 세계와 나의 절연,무의미한 관계이면서 나를 강박하는 일상이다.

마약은 핵심 사건이 아니다.반항이 거세된 시대의 반항,광기가 사라진 시대의 광기를 드러내는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또 통과의례도 아니다.그 변질,그 왜소함,무광택지처럼 밍숭밍숭한 청춘의 그 무료함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끈질기게 붙어

있는 유혹이다.랜튼이 돈가방을 들고 튄 것은 그 끔찍한 우정과 일상의 더러운 유혹에 대해 침을 뱉고 배반을 선언한 행위를 의미한다.그는 무의미에서의 탈출을 선택한 것이다.

60년대에 저항의 광장이 있었다면,70년대엔 아무도 못 믿을 비열한 거리가 있었다.그럼 90년대는?혼자 숨어있기 좋은 방이 있다.자,대책은 없지만 여하튼 랜튼은 그 방을 뛰쳐나갔다.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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