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총리 역할 재정립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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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참여정부 1기 내각을 통할했던 고건 총리가 1년3개월 만에 물러났다. 高총리가 어제 국무회의장을 떠날 때 노무현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기립박수로 환송했지만 분위기는 시종 떨떠름했다고 한다. 高총리의 개운찮은 퇴진은 국무총리의 위상과 역할을 되돌아보게 한다.

高총리가 국무위원 제청권 행사를 거부하고 사표를 던진 데 대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찬반은 있을 수 있다. 그가 총리 재임기간 중 과연 헌법에 명시된 총리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그동안 각료 제청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했는지, 총리가 대통령에게 정치적 상처를 주고 물러나야 했는지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高총리의 과거 행적이나 의중과는 상관없이 청와대의 집요한 제청권 행사 요청을 끝내 거절하면서 헌법정신을 지키겠다고 한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일과성으로 넘기기엔 너무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른 高총리의 사퇴 파동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盧대통령은 高총리를 임명할 때 '몽돌(대통령)과 받침대(총리)'라거나 '개혁'대통령-'안정'총리라고 강조했는데, 과연 그 말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高총리는 탄핵심판기간에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아 국정을 안정되게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특수상황을 제외하면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국민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의전(儀典)총리''대독(代讀)총리'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이다. 총리가 헌법에 명시된 대로 각료 제청권을 행사하고 내각을 통할하려면 대통령의 과감한 권한 위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총리도 또다시 허수아비에 불과할 것이다.

정치권도 총리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장.차관보다 역할이 적은 총리라면 굳이 국회에서 청문회를 하고 임명동의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대통령 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격한 검증을 거쳐 임명된 총리라면 그에 부합한 역할을 맡겨야 마땅하다. 문제가 생길 때만 떠들다 말 게 아니라, 총선과 대통령 탄핵사태에 묻혀 실종된 책임총리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해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