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모든 장관의 부총리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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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부총리'라는 자리가 생긴 지 꼭 40년. 돌이켜 보면 이 자리의 운명도 결코 평탄치 못했던 것 같다. 한때는 대통령 다음으로 막강 파워를 휘둘렀는가 하면, 아예 자리가 없어져 버린 때도 있었고, 지금은 경제부총리.교육부총리에 더해 과학기술부총리까지 등장할 판이다.

부총리의 역사를 잠시 돌이켜 보자. 원래 부총리라는 자리는 여러 경제장관들을 총괄 지휘하라고 만들어졌었다. 부총리의 끗발로 치면 역시 이 제도를 처음 만들었던 박정희 시대가 최고였다. 1964년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제2대)을 시작으로 김학렬.남덕우.신현확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시대의 야전군사령관 격으로 사실상 국무총리보다 더 힘이 셌다. 대통령이 뒤를 받쳐주니 여느 장관들도 꼼짝 못했다. 게다가 예산권까지 거머쥐고 있어 비경제부처들까지도 경제부총리의 심기를 살펴야 했다. 통일부총리는 노태우 정권 때 통일부 장관을 격상시켰던 것인데, 그저 대외용에 불과한 것이었다.

*** DJ정권 땐 부총리제 없애기도

김대중 정권에 들어와서 졸지에 부총리제가 폐지됐다. 경제부총리 감투를 없앤 것은 물론이고 재정경제부에서 예산권을 떼어내는 바람에 경제정책의 종합 총괄기능 자체가 없어졌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최고의 경제전문가임을 자처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챙기려 했던 것이 경제부총리를 없앤 진짜 이유였다. 그랬다가 3년 만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경제부총리 제도를 다시 살렸고, 이 참에 교육인적자원부 장관까지 부총리로 만들었다.

바야흐로 부총리 양산시대다. 당시 교육부총리를 만들 때도 갸우뚱했는데 여기에 더해 과학기술부총리라니…. 과학기술 예산의 총괄기능 강화를 명분으로 정부조직법을 고쳐가면서까지 부총리 자리를 또 만들겠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더구나 과학기술 예산이 많고 복잡해 따로 부총리의 총괄기능이 필요하다는 정부 설명에 그저 기가 찰 뿐이다. 예산편성을 더 잘하라고 경제기획원 내부조직인 예산실을 따로 독립.확대시켜 장관급 기획예산처를 만들었고, 그래도 안 되는 갈등의 절충.총괄은 경제부총리가 하도록 돼 있는 것이요, 과학기술부 장관도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경제장관회의의 주요 멤버 아닌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국무조정실이 있다. 그것도 차관급 실장을 지난번 장관급으로 높였다. 대통령 비서실의 조정기능은 별도로 하고도 이 정도다. 이처럼 이중, 삼중의 시스템화에도 불구하고 조정.총괄을 명분삼아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높인다 하니 어불성설이다.

또한 경제부총리는 거시경제 정책을, 과학기술부총리는 미시경제 정책을 총괄한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거시와 미시를 총괄하라고 경제부총리를 만들었던 것인데, 또 하나의 부총리를 만들어 거시와 미시를 쪼개자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이런 식이라면 다음엔 무슨 부총리가 탄생할까. 아마도 노동부총리나 복지부총리.환경부총리쯤이 되지 않을까. 갈수록 노동문제가 복잡.심각해지고 있으니 노동부 장관도 부총리로 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요, 다른 한편에선 복지정책 강화를 위해선 보건복지부 장관이야말로 부총리 승격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나올 만하다. 이럴 바엔 아예 모든 장관의 부총리화를 추진하는 게 어떨까.

*** 일 그르치게 할 가능성 커

꼭 필요하다면야 부총리를 몇인들 못 두겠나. 부총리가 여느 장관보다 월 5만원 남짓 더 받는다. 돈 문제가 아니다. 정부직제가 이렇게 운영돼서는 말이 아니다. 부총리를 늘려 일을 잘 되게 하는 게 아니라 그르치게 할 공산이 크다. 교육만 해도 장관이 부총리로 격상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 지방 교육감 한명이 반발해도 속수무책인 형편 아닌가. 막강하다는 경제부총리만 해도 옛날 이야기다. 요즘 같아선 경제부총리가 경제팀장이라기보다 경제장관들 중 '수석 경제장관' 정도라 해야 옳다. 경제부총리가 뭐라 하든,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들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 말이다. 이런 판에 부총리 자리를 아무리 더 만든들 무슨 소용 있을까. 제대로 된 나라치고 부총리를 이렇게 많이 두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있는 부총리의 총괄조정 기능부터 제대로 강화해주는 게 순서다.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