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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와 ‘태양 왕’ 루이 14세의 특별한 인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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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14면

사나운 얼굴의 두 마리 늑대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 이 상반된 그림을 위아래로 끌어안고 있는 와인은 ‘빈 드 랑팡 제주(Vigne de L’Enfant Jesus·아기 예수의 포도밭)’다. 그 사이 와인 병 어깨 위에 띠처럼 둘러진 ‘부샤 페르 & 피스(Bouchard Pere & Fils)’라는 굵은 글자는 부샤 가문 부자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늑대와 아기 예수, 그리고 인간이 함께한 이야기의 시작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르고뉴 지역을 대표하는 곳으로 예나 지금이나 본(Beaune) 마을은 상징처럼 등장한다. 부르고뉴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수많은 부르봉 왕조 귀족들의 중심 무대였기 때문이다. 1619년 이 마을에 카르멜라 수도회가 자리를 잡게 된다. 같은 해 마게리트 파리고라는 여자아이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12세 되던 해 카르멜라 수도원에 들어간다.

파리고는 성장하면서 신과 직접 교감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637년 12월 역사적인 예언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불임으로 알려졌던 루이 13세의 부인 앤 도트리슈 여왕이 곧 왕자를 갖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이 예언은 1638년 9월 5일 실제로 일어났다. ‘태양 왕’으로 불리는 미래의 루이 14세가 이날 태어난 것이다. 파리고의 소문은 곧 왕가에 알려졌고, 다음해 카르멜라 수도회 포도밭에 아기 예수에게 바치는 기도원이 지어졌다. 그리고 성스러운 어린 아기 예수의 나무 조각상도 들어서게 됐다.

이 장소가 지금의 본 그레브(Beaune Greve) 포도밭 지역인데, 수도회에서는 이 사건 이후 ‘아기 예수의 포도밭’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아마도 예언이 있은 후 이 포도밭에서 만든 와인을 앤 여왕에게 보냈고 그녀가 성스럽게 만들어진 그 와인을 통해 불임에서 해방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의 포도밭’도 1789년 불어닥친 프랑스 혁명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모든 수도회의 재산이 국가 소유로 넘어가게 됐다. 이후 경매를 거쳐 1791년 당시 직물 산업을 통해 많은 재산을 축적하며 본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미셸 부샤 부자에게 넘어간다.

미셸 부샤는 1731년 이미 부르봉 공국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갖고 있는 고성에 양조장을 만들고 지하에는 터널로 연결된 오래된 셀러를 둔 유서 깊은 와인 가문이다. 이들 가문의 문장에 새겨져 있는 두 마리의 늑대는 강력한 힘을 상징한다. 당시 늑대를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가문이라면 힘이 있어야 했고, 두 마리씩이나 문장에 사용했다는 것은 그 가문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이다.

미셸 부샤는 4㏊의 ‘아기 예수의 포도밭’을 인수한 후 다른 어떤 포도와도 섞지 않고 순수하게 이곳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만을 사용해 와인을 만들었고 그 이름을 ‘빈 드 랑팡 제주’라 명했다. 레이블에는 오래전부터 이 포도밭을 지켜온 아기 예수 나무 조각상을 새겨 넣었다.

‘아기 예수의 포도밭’ 와인은 1791년부터 지금까지 전통을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100% 피노 누아가 자라는 포도밭은 자갈이 풍부하고 경사가 급하며 일조량이 풍부하다. 포도나무 뿌리가 깊이 내려 다양한 층의 영양분을 섭취하기에 알맞은 환경이다. 덕분에 이 포도밭 포도로 만든 아기 예수 와인은 농밀하면서 향이 깊고 높은 단계에서 균형이 잘 이루어진 세련미를 보여 준다. 그래서 와인은 30년이 지나도 맛이 꺾이지 않는다.

필자는 몇 년 전 이 양조장을 방문해 미셸 부샤의 9대손에게서 직접 포도밭에 대한 설명을 듣고 셀러 마스터와 함께 여러 병의 와인을 시음했다. 마지막으로 시음한 것이 1976년산이었는데 오래된 좋은 부르고뉴 와인에서 풍기는 자연산 버섯 향기와 흙 향기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셀러 마스터는 그날 저녁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천천히 음미해 보라며 병을 주었고 필자는 늦게까지 거실 살롱에서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음미했었다. 12월은 아기 예수가 탄생한 달이다. 온 천지에 종이 울리고 예수가 태어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아기 예수 와인이 함께한다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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