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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산골마을 지붕 위의 수호천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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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이런 장면, 기억나세요? 어린 시절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안방 TV에서도 갑자기 주룩주룩 비가 내리곤 했습니다. 안테나를 점검하러 옥상에 올라간 아빠가 외칩니다. “이제 잘 나오니?” “아뇨. 조금만 더 움직여 봐요. 앗, 지금 막 잘 나왔는데….” 왕(王)자 모양 안테나와 씨름하던 아빠는 흰 러닝셔츠가 흠뻑 젖어 지붕에서 내려오셨지요 .

웬 옛날 이야기냐고요? 그럴까요. 아직도 대한민국의 어딘가에서 지직거리는 TV 화면을 조정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세요? 케이블 선이 닿기엔 멀고 먼 산골, 전파조차 산에 막혀 깨끗한 TV를 보는 것마저 사치인 동네들이 아직도 있답니다. 이런 곳을 찾아다니며 안테나를 바꿔주고, 독거 노인들의 ‘생명줄’인 무선 페이저(호출기)를 점검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앙전파관리소의 ‘CS(Customer Satisfaction) 기동팀’입니다.

CS 기동팀은 일 년에 두 번씩, 전국의 난시청 지역으로 순회서비스를 떠납니다. 중앙전파관리소 대구지소 CS 기동팀이 이번에 찾아간 곳은 경북 청송이었습니다. 산바람을 헤치며 기동팀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경북 청송> 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전파관리소 사람들

 하늘이 파랗다. “날씨가 좋아 다행이네요. 비 오는 날 지붕에 올라가려면 감전 걱정에 긴장하거든요.” 차에 가득한 안테나를 정리하던 정국진 주무관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전국적으로 20개 팀이 활동하고 있는 CS기동팀은 평소 불법 전파 이용에 관한 민원(080-700-0074)이 들어오거나 TV 수신장애 신고를 받으면 달려가는 ‘전파 해결사’다. 오지는 아예 날을 잡아 순회서비스에 나선다. 이날부터 3일간 경북 청송 산간 지역을 돌게 될 멤버는 대구지소 기동팀의 강춘갑 팀장과 주경·정국진·이상훈 주무관이다.

이들의 미션은 세 가지다. 우선 근처 산이나 건물 때문에 지상파TV가 잘 나오지 않는 집들을 찾아가 상태를 개선해 준다. 둘째, 청송 인근에서 불법으로 전파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없는지 점검한다. 셋째, 장애인이나 독거 노인들이 위급할 때 119에 바로 연락할 수 있도록 보급해준 무선 페이저의 작동 상태를 점검한다.

첩첩산중의 청송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난시청 지역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65세 이상 노인이라 점검해야 할 호출기의 수도 많다. CS기동팀의 바쁜 일과가 시작됐다.

"전파 도둑 찾다가 도박범도 잡아요”

미션 하나 ‘새벽이’를 사수하라

청송 일대의 높은 산들은 사람만이 아니라 전파에도 장애물이다. 그나마 시내에서는 케이블이나 중계유선을 통해 깨끗한 TV를 볼 수 있지만, 깊은 산골 마을은 수익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케이블 선이 깔리지 않은 곳이 많다. 진보면의 최필순(77)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마당에서 콩을 다듬고 있던 할머니가 반색하며 기동대를 맞는다. “엠비씨는 지직거리면서도 쪼매 나오는데, 케비에스가 며칠째 안 나와. 답답해 죽겄어.” 두 채로 분리된 커다란 집에 할머니는 혼자 산다. 두 아들이 있는 서울에도 가끔씩 머물지만, 아파트가 숨막히고 심심해 추운 몇 달 빼고는 대부분 청송에 내려와 지낸다. 집 뒤 언덕에 오르니 언제 바꾼 건지 알 수 없는 녹슨 안테나가 서 있다. “할머니, 안테나가 너무 낡아 그래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기동팀이 안테나 교체 작업을 시작했다. 수리에 걸린 시간은 겨우 10여 분. “이제 잘 나올 거예요. 확인해 보세요”라는 말에 할머니가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나 방으로 갔다. 할머니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아유, 이제 새벽이(KBS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의 주인공) 볼 수 있겠네. 며칠 못 봤더니 친구들하고 얘기가 안 돼. 근데 기자 아가씨, 새벽이는 어찌 되는 거유. 잘 되는 거지?”

주왕산 북서쪽 자락의 진보면은 64%가 난시청 지역이다. 그나마 광덕1리는 벌판 너머 언덕에 솟아 있는 송신탑에서 직선으로 전파가 도착해 TV 가 잘 나오는 편이란다. 권영철(88) 할아버지, 김중수(89)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아버지가 열일곱, 할머니가 열여덟에 결혼해 70여 년을 함께 살았다. “TV 안 나온다고 해서 고쳐드리러 왔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파자마 차림으로 뛰어나온다. “대구 사는 아들이 안테나를 달아주고 갔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영 안 나와.” 방 안에 있는 조그만 TV 화면은 회색 점과 선으로 뒤덮여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기동팀 3명이 사다리를 타고 나란히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집이 무너질까 걱정되는지 할머니가 스웨터를 주섬주섬 걸쳐 입으며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노 부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TV를 켜놓는다. 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 “촌구석에서 사는 낙이 이거 말고 있나.” 수리를 마친 기동팀이 지붕에서 내려왔다. 지저분하던 화면이 수세미로 박박 닦아낸 듯 말끔해졌다. “이거 고마워 어쩐댜. 대추라도 한 알씩 먹고 가소.” 할아버지가 마당에 널려 있던 대추를 한 줌 집더니 “그냥 갑니까. 미안해 어쩝니까”하며 기동팀의 뒤를 따라나선다. 차를 타고 다음 집으로 가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언제 넣었는지 대추 한 움큼이 잡혔다.

미션 둘 ‘전파 도둑’을 잡아라

진보면 문화체육센터에 마련된 CS기동팀 민원접수대로 30대 중반의 한 남성이 찾아왔다. 청송에서 활동하는 아마추어 무선통신사 중 한 명이다. 중앙전파관리소에서는 전파의 불법 사용을 감시하기 위해 아마추어 무선통신사들을 자율지도위원으로 임명하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12명이 활동 중이다. 이들은 평소 통신을 하면서 전파를 방해하는 전파 도둑이 없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전파에도 도둑이 있다? “전파는 공공의 재산이잖아요. 그걸 쓰려면 허가를 받거나 신고를 해야 합니다. 절차 없이 전파를 사용하는 건 도둑질인 셈이죠.” 강춘갑 팀장의 설명이다. 오늘 신고가 들어온 곳은 농협중앙회 청송지점 인근. 이곳에서 불법 전파 사용이 감지되고 있단다.

차 위에 안테나가 달린 이동 방향탐지차를 타고 기동팀이 출동했다. 차 안에는 커다란 계기판과 버튼이 붙은 방향탐지 설비가 자리 잡고 있다. 전파 측정장치를 가동하니 모니터에 작은 원이 나타난다. 새고 있는 전파에 가까이 갈수록 화면 안의 원은 점점 타원 형태에서 동그란 모양으로 바뀐다. “이 부근이네요.” 정국진 주무관이 장소를 체크하자 주경 주무관이 휴대용 방탐기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구멍 뚫린 안테나가 양쪽으로 불쑥 나온 방탐 가방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는 기동팀을 주민들이 신기한 듯 바라본다. “여기입니다”라며 주경 주무관이 멈춰선 곳은 대로변의 한 전신주 앞. 인근 안동 지역의 케이블 방송국에서 설치한 전파증폭기에서 전파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불법 전파 사용을 적발하거나 불법 도청장치를 찾아내는 것은 전파관리소의 주요 업무다. 감청 탐지기가 장착된 차를 이용해 여관·사무실 등에 불법으로 도청장치를 설치한 사람들을 잡아내기도 한다. 기대보다 시시한 ‘도둑의 정체’에 실망하는 기자에게 기동팀이 덧붙인다. “이상한 전파가 잡힌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면 오늘처럼 전파 누설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불법 전파 사용이 범죄와 연관돼 있는 경우도 의외로 많아요. 불법 무전기를 쓰고 있는 도박장을 급습, 경찰과 함께 검거한 적도 있으니까요.”

마지막 미션 독거 노인의 생명줄, 무선 페이저를 점검하라

이제 기동팀에 가장 중요한 임무가 남았다. 이 지역 독거노인이나 장애인에게 보급된 무선 페이저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10년 전부터 한국에 도입된 무선 페이징 시스템은 몸이 불편한 이들과 119 구급대를 이어준다. 홀로 살고 있는 독거노인이나 장애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걸이 형태로 된 페이저의 버튼을 누르면 집 안의 유선전화와 연결돼 119에 바로 연락된다. 현재 전국적으로 10만여 가구에, 안동·청송 지역에만 594대가 공급돼 있다.

안동소방서에서 파견된 소방대원들과 함께 진보면·부남면 인근에 있는 독거노인들의 페이저를 점검하러 나섰다. “시골에는 홀로 사는 노인이 너무 많아요. 한 달에 한 번 점검을 위해 들르면 너무 좋아하시죠.” 안동소방서 김경순 소방관의 말이다. 시내에서 먼 곳일수록 점검이 쉽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자동차로 1시간여를 달려 청송군 부동면 라리의 이원수(87)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주왕산 깊은 자락에 숨어 있는 이 동네는 버스가 없어 시내에 나가려면 20분 넘게 정류장까지 걸어나가야 한다. 부엌 바닥에 앉아 고추를 다듬고 있던 할머니가 난데없이 들이닥친 손님에 깜짝 놀란다. “아유, 어떻게 여기까지 왔누.” “할머니, 119 누르는 거, 어디 두셨어요?”라는 물음에 서랍에 고이 넣어둔 페이저를 꺼내는 할머니. “이거 서랍에 두지 마시고 항상 몸 가까이에 갖고 있으세요. 갑자기 쓰러지거나 하면 누를 수 있게.”

페이저의 버튼을 누르자 “비상버튼이 작동되었습니다, 119에 연결되었습니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유선전화에서 119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119입니다. 괜찮으세요?” 혼자 사는 할머니는 등과 다리가 아파 한 달에 한두 번 시내 병원에 가지만 아직까지 서비스를 이용해본 적이 없다. “쓰러져서 정신 없는 거 아닌데, 119 부르면 되나”라는 생각에서다. “몸 아파 병원에 갈 때 이용하셔도 돼요”라는 기동팀의 말에 “고맙다”며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김의선(83) 할머니 댁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머문다. 자식 없이 홀로 된 지 50년, 좁은 방의 한쪽 벽에는 지금보다 한참 젊었을 때 찍은 듯한 사진이 걸려 있다. 무선 페이저에 대해 설명하는 기동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할머니는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할머니, 사진 보니 젊었을 때 정말 미인이셨네요”라는 정국진 주무관의 너스레에 비로소 쑥스러운 웃음이 스친다. 무선 페이저 점검 완료. 무사히 임무를 마쳤지만 대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영 무겁다. 할머니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오래도록 기동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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