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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은 달랑 한 장 남았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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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3일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IMF 긴급자금 지원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뒷줄 맨 왼쪽에 최중경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협력과장(MB정부 첫 기획재정부 차관), 두 사람 건너 강만수 재경원 차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서 있다.

이코노미스트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1월 마지막 주 거의 매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11월 24일 차기 정부 각료 중 경제팀 인선을 가장 먼저 발표했다. 그는 “지금 1분도 허비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에는 백악관 예산실 인선을 발표하며 “예산안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한 줄 한 줄씩 검토해 낭비를 없애겠다”고 역설했다. 26일에는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ERAB) 신설과 의장 내정자를 발표했다.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이겠다는 대통령 당선인의 강력한 경제위기 극복 의지 표명 덕분인가. 각종 경제지표가 좋지 않게 발표되는 가운데에서도 미국 주가는 나흘 연속 상승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바삐 움직였다. 주요 20개국(G20) 금융 정상회의 및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등 열이틀간의 해외순방을 마치고 11월 25일 저녁 귀국해 이튿날 아침 긴급 경제상황점검회의를 주재했다. 대통령은 회의에서 “전대미문의 위기에는 전대미문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7일 아침에는 여당 최고위원들과 회동해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지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자세로 일하겠다”며 공자의 말씀을 인용했다. 하지만 말만 무성할 뿐 제대로 되는 게 없다. 건설·조선·해운업의 부실이 심각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서 총대를 메는 부처는 없다.

은행더러 알아서 하라지만, 당장 제 코가 석자인 은행들이 나설까? 한국은행이 콜금리를 내리고 아무리 돈을 풀어도 시장에 돈이 돌지 않고 기업들은 자금난에 허덕인다. 그럼에도 정부는 보이지 않으니 말만 있고 행동은 없다는 ‘NATO(No Action Talk Only) 정부’란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말이 앞서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거나 거둬들이는 경우마저 나타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11월 24일 미국 LA 동포 간담회에서 “지금 주식을 사면 최소한 1년 내 부자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한국이 아무리 잘해도 물건을 내다 팔 수 없어 내년이 되면 정말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내년 경제가 더 어려워질 거라면서 주식투자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은 모순이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예전에 쓰던 낫과 망치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짝짓기도 가능하다”며 금융권의 강력한 구조조정을 암시했다가 논란이 커지자 스스로 말을 뒤집었다. 그 옆집 금융감독원은 부정적인 조사분석 보고서가 시장 불안을 키운다며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보고서에 대한 모니터링에 들어갔다.

코스피 지수가 500선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예상한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의 입을 막는 것으론 모자랐던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 한국 경제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은행이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12월 업황(業況)전망지수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94년 이래 가장 낮다.

기업들이 경기 전망을 외환위기 때보다 나쁘게 보는 것이다. 게다가 올 4분기나 내년 1분기 경제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로 돌아서리란 전망까지 나온다. 내년 성장률 전망도 2%대가 대세다. 성장률 2%대로는 일자리 창출 기대는 접어야 한다. 일자리가 늘기는커녕 되레 줄어들 수 있다.

대통령이 APEC 기조연설에 이어 거듭 강조한 전대미문의 대책 대신 한국은 12월 2일 미국 중앙은행으로부터 40억 달러를 들여와 은행권에 풀었다. 한·미 통화 스와프 계약 체결 자금 300억 달러 중 1차 분이다. 다른 나라나 국제기구에서 정부가 달러를 빌려오긴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자금을 들여온 지 11년 만의 일이다.

달력도 이제 달랑 한 장 남았다. 올해 미국을 대표하는 단어로 ‘구제금융(bailout)’이 선정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곧 올해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고사성어를 선정할 것이다. 그 후보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은 어떤가?

양재찬 편집위원·ja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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