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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최초 IOC 선수위원된 문대성강의실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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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지난 베이징 올림픽 때 현지 선수촌에서 태권도복을 입고 행인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지금은 IOC 선수위원이 된 문대성이었다. 그때 그 모습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대변한다. 자신의 꿈을 위해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삶의 진정성이 가득한 그의 이야기.

지난 9월 10일, 부산 동아대학교 송학 캠퍼스를 찾았다. 베이징 올림픽의 또 다른 스타 문대성(32)을 만나기 위해서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80kg 이상급 태권도 결승전에서 시원한 뒤돌려 차기로 금메달을 목에 건 그.

4년전 대한민국을 열광시켰던 그는 최근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으로 당선돼 금메달 못지않은 쾌거를 이뤘다. 그가 태권도학과 교수로 몸담고 있는 동아 대학교 스포츠과학대에는 그의 당선을 축하하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오후 2시. 강의실에는 태권도학과 학생들이 문대성 교수의 2학기 첫 강의를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실 뒷문으로 들어온 그는 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잘 지냈냐”는 인사 를 건넸다. 한 명 한 명 다정한 목소리로 학생들의 출석을 부르는 그는 경기장에서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태권도 경기론’수업에서 그는“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가끔은 출장을 가느라 수업에 못 들어올 수도 있지만, 강의는 충실하게 할 것이니 걱정 마라”며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한 학기 동안 태권도 경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보고, 직접 경기도 해보자”고 말하는 그는 마치 열성적인 학생같은 모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많은 학생이 줄을 서서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당선되고 나니까 생각보다 할 일이 많더라고요. 문화관광부나 외교통상부 쪽에서도 연락이 오고, 이제 저는 정부와 협력해야 하는 독립된 단체라고 생각해요. 한국을 넘어서 세계와 소통하며 스포츠 외교를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태권도를 살리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태권도에 대한 걱정부터 늘어놓았다.

IOC 선수위원이 됐다는 뿌듯함을 느낄 새도 없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았다. IOC 선수위원은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의 직접 투표를 거쳐‘국제올림픽위원회’위원으로 뽑히는 자리다. 올림픽 개최지 투표권 등 모든 권한이 일 반 IOC 위원과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만이 IOC 위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 낯선 베이징 땅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 하루 15시간 동안 선 채로 가슴에 호소하다

문대성은 지난 8월 5일부터 20일까지 진행한 IOC 선수위원 선거에서 총 투표수 7216표 중 3220표를 얻어내 압도적으로 1위에 당선됐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인 호주의 수영 선수 그랜트 해켓과 주최국 중국의 육상 선수 류상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그가 당선됐을 때, IOC 안팎에서‘이변이 일어났다’는 반응이 분분했다. 그만큼 실제로 그가 해낸 일은 인간승리에 가까웠던 것.

그는 그동안 자신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음이 분명하다. 2004년 금메달리스트가 되고 난 뒤부터 꿈꿔 온 IOC 선수위원으로 뽑히기 위해 그는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다녀 오는 등 꾸준히 영어 공부를 했지만,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선수위원이 되려면 자신의 의견을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돼야했다. 고민 끝에 그는 이번 선거를 위해 80개의 영어 문장을 준비해 그것을 모두 외웠다. 예상 질문과 답변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 넣은 것. 그리고 다른 후보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점을 고려해 발로 뛰며 자신을 알리는 방법을 택했다.

한국 선수들을 제외하고 10명 남짓한 사람들만 그가 누구인지 알 정도로 그의 인지도가 턱없이 낮았기 때문. 7월 28일,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그 후 25일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올림픽 선수촌 식당앞에 서서 자신을 알렸다.

8월 베이징의 뙤약볕 아래, 하루 15시간을 꼬박 서서 인사하는 것은 중노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힘든 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미쳤다”고 말하는건 기본이고, 그가 손을 잡자 뿌리치며 더럽다는 듯 자기 손을 닦는 외국 선수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을 때는 쫓아가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마저“너무 오버한다”“절대로 안된다”고 말할 때면,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몸이 지치다 보니 한때는‘이렇게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저절로 나더라고요. 그러다 예전에 힘들었던 때를 떠올렸죠. 그때는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했고, 무엇보다 꿈이 없었거든요.‘나는 대한민국 대표로 이렇게 서 있는 거니까, 그 자체로도 행복하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죠. 그 후부터 신기하게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웃음).” 많은 사람의 온갖 비아냥을 들으며 때론 회의감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안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나를 벗어나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본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힘든 일이 생길 때면 그 상황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화가 나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지만,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면 헤쳐 나갈 방법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 가난의 설움을 태권도로 이겨낸 어린 시절, 치매 앓는 어머니 안고 자는 효심 어린 아들

실제로 그는 가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인천의 판잣집에서 3남 4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싸워야 했다. 저녁 한끼만 겨우 먹을 정도로 지독한 가난이었다.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를 가지 못하는 누나들을 보며,‘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성적이었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한번은 혼자 운동장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형들에게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저녁때가 됐는데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 오은자(67)씨가 그만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가난도 서러운데, 남들에게 맞는 아들을 보고만 어머니는 다음날 바로 아들을 태권도부에 넣었다. 그렇게 그는 태권도를 처음 배웠고, 팔다리를 힘차게 뻗으며 그동안 참아 온 울분을 터뜨렸다. 답답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 태권도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오로지‘태권도’만 생각하며 보낸 그는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부 산 동아대학교 태권도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지금의 그를 존재하게한 은사 김우규(61) 교수를 만났다. 김우규 교수는 집안 형편 때문에 주말에도 내내 기숙사에 있는 그를 불러 용돈을 건넸고, 한약을 사주기도 했다.

그는“태권도는‘도’다. 경기장에서나 사회에서나 항상 예의를 갖춘 사람이 돼야 한다. 운동선수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실업팀‘삼성 에스원’에 들어간 그는 세계대회에서는 처음으로 1999년 캐나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금메달을 목표로 준비하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아쉽게도 국가대표 선발 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렇게 부침이 많은 태권도 인생을 살면서 그는‘2등 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쓰라린 현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항상 그를 응원해 주던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

어머니는 한때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한 치매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운동선수 아들이 행여 다치지 않을까 늘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건강을 잃었을때, 그는“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고 한다. 문득 몇년전, 한 인터뷰에서 태권도를 하는 이유가“어머니에게 금메달을 선물해 효도하기 위해서”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도 가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직접 목욕시켜 드린다. 어떤 때는 부둥켜 안고 잠을 잘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다.

“예전에는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셔서 두 시간은 지나야 잠을 잘 수 있었어요. 지금은 다행히 어머니 건강이 많이 좋아졌죠. 집에 일찍 들어온 날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 근처 운동장을 돌면서 산책을 하는데, 그때마다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항상 어머니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어요.” 만약 사람마다 인생에서 겪어야 할 고난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면, 그는 지난 세월에 자신이 겪어야 할 모든 고난을 다 겪었을지 모른다.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그가 가장 믿고 따랐던 큰 누나가 임파선암 판정을 받은 것. 항상“네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며 동생을 안타까워 했던 든든한 누나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다시 일어서는 것. 좌절됐던 금메달에 다시 한 번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남들이 쉴 때도 죽을 힘을 다해 연습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출전은 그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 올림픽 제패, IOC 선수위원 당선, 지치지 않는 그의 꿈들에 대하여…

올림픽 결승전까지 오는 동안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경기 시작 2분 만에 왼발 뒤돌려차기로 KO승을 거뒀다.

하지만 승자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문대성은 상대 선수 니콜라이디스에게 다가가 뜨거운 포옹을 나눴고, 그의 손을 높이 들어 주었다. 실패를 많이 겪어 본 그였기에 패배자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내는 그 모습에 감동 한 사람들의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날의 경기는 태권도 정신을 세계인들에게 각인 시켰다.

금메달리스트가 된 후, 그는 순식간에 스타가 됐다. 수많은 인터뷰와 CF 요청이 들어왔고, 그의 뛰어난 외모에 관심을 가진 많은 매니지먼트사들이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이종격투기 선수로 이적하면 1년에 10억을 보장하겠다는 유혹이 다가오기도 했다.

그동안 가난을 벗어나려 애쓰던 그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알고있었다.

그는 아테네 올림픽 당시를 잠시 떠올리며 “금메달을 따기 위해 했던 훈련보다 IOC 선수위원이 되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 더욱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 소망을 이룬 지금, 그의 어깨에 놓인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내년9월 코펜하겐에서2016년 하계올림픽 개최지와 종목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려요. 태권도가‘살아 남느냐, 없어지느냐’하는 문제가 달린 매우 중요한 회의죠. 어떻게 하면 임기 8년 동안 태권도를 전 세계인들이 좋아하고 재미있는 경기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세계무대에서 스포츠 외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어 공부가 절실하다는 것을 잘 알 기 때문에 그는 요즘 서울에 머물면서 하루 7시간씩 영어 공부를 한다. “ 학생때는 공부보다 태권도가 더 좋아서 1시간도 책상에 앉아 있지 못했는데, 요즘은 하루 종일 CNN이나 AFKN 방송을 틀어 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며 웃어 보였다.

IOC 선수위원들과 함께 포럼을 만들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그. 혹자는“금메달리스트이고, 이제 IOC 선수위원도 됐는데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올라가야 할 계단이 아직도 많다”고 말한다.

그는“훌륭한 IOC 선수위원으로 성장해야 하고, 지도자로 성공 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며 다음 목표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지도자로서 욕심도 많다. 2003년에 마련한 태권도장을 아이들이 편안한 환경에서 태권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꿈의 체육관으로 만들고, 동아대학교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싶단다.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덕에 그는 어느덧 서른두살이 됐다. 이제껏 태권도만 생각하고 살아온 터라 연애는 뒷전이었지만, “지금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하지만“아직 결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 IOC 선수위원이 되는 것 등 자신이 목표로 정한 꿈을 모두 이루었음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늘 새로운 꿈을 꾸고, 그것을 이뤄 가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문대성은 그렇게 누구보다 삶을 진지하게 대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당당한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기획_강은영 기자 취재_지희진(자유기고가)
사진_임효진(studio lamp), 동아대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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