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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 전환⑥ 자신의 히트곡 ‘뮤지컬’처럼 살아가는 디자이너 임상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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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호 14면

맨해튼 사무실의 임상아씨. 오른쪽은 밍크 가죽으로 만든 SANG A의 핸드백.

1990년대 중반 가수·탤런트·MC 등으로 맹활약했던 임상아(35)씨. 미국 뉴욕 생활 10년째인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 변신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고급 핸드백 브랜드 ‘SANG A’로 업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뉴욕 현지의 임씨와 두 차례에 걸쳐 전화 인터뷰를 했다.(음표 안은 ‘뮤지컬’ 가사)
 
♪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아, 음악과 춤이 있다면 ♬
임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무용을 배웠다. 91년 한성대에 입학해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대학 2학년 때 뮤지컬 극단에 들어갔다. 이 극단의 창단 공연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코러스를 맡았다. ‘이수일과 심순애’ 공연 때는 어머니가 구경 왔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단다. 코르셋 복장에 망사 스타킹 신고 춤추는 딸이 안쓰러워서였다.

핸드백 이어 드레스 사업 계획, 라이프 브랜드로 키운다

그는 TV CF 데뷔 뒤 MC·탤런트·가수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97년 1집 음반을 냈다. 1집 음반에 들어간 노래 ‘뮤지컬’은 처음엔 별 반응이 없었으나 다음 해 2집을 낸 뒤 불이 붙었다. 요즘 노래방에서도 애창곡으로 사랑받는다. 왜 이 곡이 뒤늦게 인기를 얻었을까. “직접 부르기 좋은 노래가 있잖아요. 가사도 희망을 주는 내용이고….”

♪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세상으로 ♬
98년 11월 오디션을 보러 뉴욕에 열흘 출장을 왔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문득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막 3집 음반을 내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혀 있던 그가 왜 이렇게 돌발적인 결정을 내렸을까. “그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 돌아가면 영영 못 할 것 같았죠. 제가 원래 이거다 싶으면 일단 저지르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에요. 제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하죠.”

한국에서 가져온 가방 속에는 코트 두 벌, 정장 한 벌, 신발 두 켤레뿐이었다. 그해 겨울 참 추웠다. 집에 연락해 필요한 짐을 추가로 공수받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AFKN 라디오를 즐겨 들어 한때 ‘영어 좀 한다’는 소리도 들었기에 밥은 시켜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는 뉴욕,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랭귀지 코스와 대학 강의에 매달렸다. 그는 뉴욕대에서 1년간 영화를 공부하고, 파슨스디자인학교에서 1년 반 동안 비즈니스와 디자인 드로잉 코스를 밟았다. 2000년 패션업체에서 무급 인턴도 했다. 상사의 호통을 견디며 무거운 짐도 날라야 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떠올리면 된단다.

♪ 또 다른 길을 가고 싶어, 내 속의 다른 날 찾아 ♬
2003년 독립해 ‘SANG A, INC’를 설립한 그는 3년 뒤 같은 이름의 핸드백 브랜드를 내놨다. 사무실은 뉴욕 맨해튼의 소호에 자리 잡았다. 현재 직원은 두 명뿐이다. 임씨가 디자인·상품 개발 등 필요한 건 다 한다. 요즘엔 내년 가을·겨울 시즌에 선보일 제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자체 판매 점포는 아직 없고, 여러 브랜드를 함께 파는 ‘멀티숍 부티크’나 일부 백화점이 판로다. 하지만 서울을 비롯해 전세계 16 곳에 진출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악어·도마뱀·뱀·밍크 가죽으로 만든 고급 핸드백이 주력 상품이다. 가격대는 150만~1500만원 선. 지난해 그는 제일모직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유망 한국인 디자이너에게 주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상을 받았다.

-디자이너로 성공한 건가.
“글쎄…. 혈혈단신 미국에 건너와 이렇게 뉴욕에 자리 잡았다는 점만으로 한국에선 그렇게 보는 분이 많은 것 같다.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쪽 시각으로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다. 아직 성공을 말하긴 이르다. 다만 성공을 향한 정상 궤도(right track)에 올랐다곤 본다.”

-매출은 얼마나 되나.
“지난해 8월 미국 보그 잡지에 신예 디자이너로 소개되면서 매출이 50~100% 늘었다. 매출보다 업계에서 얼마나 인정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내 존재가 업계 리더들의 레이더망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
“아름답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시대가 원하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는 듯 따라가야 한다. 열정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감(感)’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한국 사람, 눈치 하나는 끝내주지 않나.”
 
♪ 나 또다시 삶을 택한다 해도 후회 없어 ♬
그는 아침에 맨해튼에 있는 집에서 눈뜨면 블랙베리(e-메일 사용이 편리한 휴대전화)부터 확인한다. 사업 특성상 국제 업무가 70%다. 처음 1~2년간은 외국 현지시간에 맞추기 위해 오전 두세 시에 일어났다 눈 붙이고, 네댓 시에 다시 일어나는 강행군을 했다. “영어 구사력이 떨어지는 비(非)영어권 사람과는 커뮤니케이션을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영어를 외국어(세컨드 랭귀지)로 배웠기 때문에 이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유리해요. 미국 직원들에게도 ‘차라리 바보처럼 또박또박 말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콘서트장에서 만난 유대인 음악 프로듀서(38)와 2001년 결혼했다. 딸(4) 하나를 뒀다. 남편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1년 반 교리를 공부하고 랍비 앞에서 구두시험까지 쳤다고 한다. 2년 전 임씨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영어 말소리부터 베이컨 냄새까지 모든 게 밉고 싫었다. 그렇게 1년 반을 고생했다. “남편 없었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게 결혼하고 애 낳고 가정을 이룬 거죠.”
 
♪ 저 세상의 끝엔 뭐가 있는지 더 멀리 오를 거야 ♬
그는 명품이 아니라 왜 ‘SANG A’를 사야 하느냐는 바이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곤 한다. “내 목표 고객은 옷장에 아르마니와 구찌가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명품은 지겹고 뭔가 하나쯤 새로운 게 필요한 이들이다. 너무 실험적이지 않으면서 전위적(前衛的)이고 귀여운 터치가 있어 나이 상관없이 스타일을 낼 수 있다.”

임씨는 내후년에 드레스 쪽 사업도 할 계획이다. “낮에 심플하게 입고, 퇴근 후 바로 칵테일·디너파티에 갈 정도로 간편하면서도 정장(dress-up) 효과를 낼 수 있는 옷을 만들 거예요.”

더 야심 찬 계획도 있다. ‘SANG A’를 장차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드레스를 시작으로 의류·액세서리·향수와 홈 인테리어, 부동산까지 자신의 브랜드 하나로 아우르겠단다. “보통 지금의 나 정도까지 왔다가 사업을 더 키우지 못하고 무너지는 디자이너가 많아요. 지금은 경영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할 때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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