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김기영감독 회고전 "이어도"를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변두리 오래된 술집 혹은 재래식 가옥에 들어선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배우들의 더벅머리나 초보적인 특수효과,구태를 간직한소품들에 실망할 수도 있다. 보는 이의 탓만은 아니다.정확히 20년의 세월이 김기영감독의.이어도'(77년)와 오늘 우리 관객 사이에 끼여있으니,그러나조금 더 오래.이어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아마도 시간의 두께를 뚫고 새어나오는 무서운 투시의 시선을 느 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속도전에 경사된 우리 영화들이 결코 이루지 못한 인간의 욕망과 운명에 대한 치열한 통찰,죽음을 향한 타나토스를거침없는 에로스로 뛰어넘는 장대한 예지의 선언,주술.자연과 과학을 교직시킨 치밀한 감각..회고전'의 이름을 달고 나왔지만 김기영은 회고의 대상이 아니다.추억의 자리에 머물기에는 너무 뜨겁고 역동적이다. .이어도'를 다시 보는 것은 잊혀진 스타일리스트의 영화를.새롭게' 음미하는 일이며 뒤늦게나마 한국영화에 관한 논쟁을 시작하는 일이다. 제주신문사 기자 천남석이 이어도를 찾아 떠나는 배 위에서 실종된다.그와 같이 술을 마신 관광회사 부장이 범인으로 지목되지만 곧 풀려나고,그를 의심하는 신문사 국장과 그는 함께 천남석의 고향인 제주 근처의 작은 섬으로 들어간다.영화 는 미스터리스릴러의 구조를 밟아 진행된다.그리하여 숱한 의문이 제기된다.천남석은 어떻게 죽게 되었는가.누가 민자인가.할머니의 정체는 무엇인가.이청준의 소설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이 모든 물음은 남성-바다-죽음-이어도라는 샤머 니즘적 해석으로 연결되는데서 나아가 여성-물-삶-현세라는 김기영 특유의 여성적 상징의원형으로 회귀한다. 수년뒤 부장이 섬에 오를 때 진분홍 치마 너머로 들어가듯이 영화는 생명의 잉태와 소멸,인간 욕망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천남석이 그토록 매달린 전복양식업은 전복의 형상이 상징하는 바 여성의 자궁이다.죽음의 운명을 거부하고 탄생을 사주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시체와 정사를 나누는 식의 그로테스크한 양상으로까지 이어진다. 불임을 극복하고 생을 쟁취하려는 이 생생한 원초적 갈망은 잦은 들고 찍기와 초점의 이동,닫힌 공간과 열린 시선의 정교한 미장센,차츰 넓어지며 복잡하게 얽혀들어가는 인물의 관계로 재현된다. 문어투의 3인칭 서술체를 구어에 삽입한 것이나 다소 산만하게 진행되는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이같은 성(性)의 활달한 운용,그리고 주제의 드넓은 기상은 참으로 그의 영화를 다시 읽게 만든다. (영화평론가) 김정룡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