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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짚기>복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도심의 지하철역은 최루탄냄새로 얼굴이 아렸다.입과 코를 막고종종걸음치는 시민과 두 줄로 늘어서 지하보도를 가로지르는 전경들.그 살벌한 틈바구니에서 복권을 파는 김기호(65.가명)씨.
1호선 개통 때부터니까 올해로 24년째다.한동안 은 아내가 일하는 사람을 두고 교대로 자리를 지켰는데 퇴직후론 그가 떠맡았다.반평이 채 못되는 좁은 공간에서 온종일을 보내지만 자식들에게 용돈타 쓰느니 보람이 있단다.
“요새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니까 케 세라 세라,막연한기대로 사는 거지.”누구나 다 아는 불경기.복권달라는 사람들의표정이 춥다.이런 때는 복권도 불황이다.될대로 되라는 마음에서사는 사람이 많아도 매주 꼬박꼬박 사던 손님이 씀씀이를 줄인다.5만원어치 살 것을 3만원어치만 쓴다.김씨는 그래도 최악이었던 지난 연말보다 낫단다.사람들은 돼지꿈이라도 꾸었는지 새해 새 다짐을 하듯 복권을 사곤 한다.
명예퇴직이니,정리해고제니 힘든 세상살이에 등떠밀린 사람들에게복권은 심정적으로는 마지막 한판승부다.복권에 승부를 걸기는 컴퓨터통신이라는 첨단매체로 복권을 파는 최용옥(35.한국복권서비스대표)씨도 마찬가지.2년전 자동차회사 영업직을 그만두면서“항공모함 한대 파는 것보다 전국민에게 볼펜 한자루씩 파는게 나을것같아”택한 업종이“평생 이거 한장 사지 않는 사람 없다”는 복권이다.
지난해 매출규모는 5억원.수익은 수수료 10%니까 5천만원.
결코 만족스런 수준은 아니지만 초창기 고생에 비하면 이제부터 자리를 잡아가는 셈이다.
복권당첨이 어렵기는 어렵다.복권의 대명사처럼 돼있는 추첨식 주택복권의 한회 발행량이 4백80만장.당첨금 1억5천만원의 1등은 그중 2장이니까 당첨확률은 2백40만분의1.단군이 단기 1년부터 지금까지 매주 10장씩 샀더라도 아직 1 등이 안나왔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최씨는“5억원어치 복권팔아 1등 한번 안나왔다”고 말하지만 20여년 경력의 김씨도 아직 억대의 1등은 팔아본 적이 없다.
“1천만원짜리는 눈앞에서 봤지.지난해 10월29일에.”하도 신기해 날짜도 잊지 않는다.오후10시쯤 문닫으려는데 학생 둘이5백원씩 내서 산 즉석복권이 당첨된 것이다.그 직전 한장을 산전경이“한장만 더 살 것을”하고 퍽 애석해했단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운좋은 학생들보다 전경이나 그 앞쪽 손님이기 쉽다.
최씨의 말.“컴퓨터로 자기에게 배정된 복권번호.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인데도 꼭 전화를 또 거는 분들이 있지요.한분은 20년동안 복권을 샀는데 1천원.5천원짜리 말고는 한번도 당첨이 안됐다는 거예요.추첨을 하기는 하냐,당첨자가 나오 기는 나오냐,자기같은 사람 괜히 들러리 세우고 속이는 거 아니냐고 계속 전화를 하시더군요.” 복권파는 사람들은“1천원짜리 복권 한장은사는 순간 5백원가치로 떨어진다”고 표현한다.당첨금 총액이 복권판매 총액의 절반규모인 것을 지적하 는 말이다.이들 생각에.
복권=사행심조장'운운하기엔 국내 복권의 확률이나 1등당첨금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경마나 다른 도박에 비해 너무 낮다.
“사람들 복권 살때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확률도 간단하게 생각하죠.몇백만분의 일이 아니라 되거나,안되거나,즉 50대50이라고 보는 거죠.”최씨의 말마따나 김씨의 가판대를 찾는 손님들의 주문(注文)은 허술하다.김씨의 말.“뭐 무슨 번호로 꼭 달라거나 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나 될까,별로 없어요.”추첨식 주택복권이 5백원짜리 두장이 한데 붙은 연식복권으로 변신,사실상 1등당첨금 3억원의 1천원짜리 복권이 된지 6개월이 됐지만“아니 이거말고 주택복권,5백원짜리 달 라니까요”하는 손님도 꽤 많다.체육.주택.기술.복지.자치.기업.관광 모두 7종이 발행되는 즉석식 복권은 말할 나위도 없다.사람들은“아무거나 주세요,긁는 걸로.”할 따름이다.
발행초기 붐을 일으켰던 즉석복권의 인기도 많이 꺾였다.김씨는“요즘 복권은 유통질서가 문제”라고 거듭 말한다.일부 발행기관이 10%로 정해진 판매상수수료를 13~14%로 올려 덤핑하거나 홍보랍시고 행인들에게 복권을 거저 나눠주기도 했다는 것이다.시장규모는 뻔한데 내용이 비슷비슷한 복권들이 난립하다 보니 벌어진 양상이다.
“올림픽 때,엑스포 때 별로 복권사는 사람이 늘지 않았어요.
월드컵복권을 낸다는데,이번엔 어떨지 몰라.”김씨는 걱정이 앞선다. “한번 만들어진 복권은 절대 안 없어진다고들 하잖아요.총판매액에서 당첨금 50%,판매비용 20~30% 떼고 나머지가 기금으로 적립되는 모양인데 그만한 예산 따내려면 복권 파는 것보다 훨씬 힘들 것 아닙니까.”최씨의 말은.허황된 꿈 을 부추겨 없는 사람 돈 긁어간다'는 복권비판론을 떠올리게 한다.
알면서도 속는 것일까.“젊은 사람들이야 즉석복권 좋아하지.나이 들면 안그래요.그래도 이거 한장이 지갑에 들어있어야 1주일이 든든하다나.”“한번에 왕창 사던 사람은 다 떨어져나갔어요.
이 정도면 취미나 레저로 봐야지요.”그네들의 옹호 론이 아니더라도 가판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다..일용할 양식'대신.일용할 위로'를 사는 모양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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