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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산업정책 이젠 폐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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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보철강의 파산위기는 정부의 산업정책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보는 시각에 따라 이번 사태에 대한 진단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자본금 9백억원을 가진 한보가 4조2천억원(96년6월말 현재)이라는 상상을 초월 하는 부채를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산업정책 때문이라는 지적이다.가령 93년에 나온.업종 전문화'정책은 당시 철강을 주력업종으로선정한 한보가 출자총액제한,동일인 대출한도및 채무보증한도 규제,여신한도관리등 모든 금융규제에서 벗어나 무리한 확장으로 내달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산업정책이 우리나라에서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80년대 전자제품.자동차 시장은 일본에,의류.신발등 저가품 시장은 아시아 네 마리 용에 내준 미국은 80년대말 결단을 내렸다.전통적으로 시장자율을 지지하는 공화당이 대외 통상압 력을 강화하고 산업에 대한 전략적 개입을 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91년 미국의 한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63%가 미국은 쇠퇴하고 있으며 61%는 국가경쟁력을 위해 정부와 업계가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노조와 재계가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결과였다.제조업의 위축으로 노조원 수 확보에 급급했던 노조로서는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업계의 입장도 다를 게 없었다.
80년대초만 하더라도 산업지원을 요구한 그룹은 철강.광산.섬유등 사양산업에 국한됐으나 90년대에는 세계적인 경쟁에 직면한첨단산업.방위산업까지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정부의 시장개입은 해묵은 논쟁거리다.국가경쟁력을 배양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경제발전을 선도하는 것은 언제,어디서나 기업가 정신이다.
기업가는 쉽게 말해 뛰어난 비전과 가치창조 능력으 로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관료중 기업가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료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개인이 기업가적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조성하는 것이지 자신이 기업가적 능력을 갖고 일하는 것은 아니다.나머지는 시장에 맡기라는 얘기다.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은 도처에 존재한다.정치는 원래 선거에서의득표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장원리와 다른 결정을 내릴수 있다.또 객관적이고 전략적인 판단보다는 이해집단의 입김에 의해 지배되기 쉽다.더 구나 관련부처의 관료들이 시장이나 산업에 대해 충분한 전문지식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대학이나 업계로부터 조언을 구하거나 공청회를 통해 보완할 수도 있지만 한계가 있다.
특히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경쟁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경영자의.도덕적 황폐(moral hazard)'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을 경우 수요예측의 실패로 인한 부실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 다.철강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98년말까지 예정된 업계의 냉연강판 총공급은 1천5백만인데 국내수요는 99년말까지 겨우 7백70만에 불과하다.나머지는 수출해야 하는데 96년 순수출(수입을 제외한)이 2백만에 불과한 실정이고 그나마 98년 후반부터 해외 철강경기가 장기침체에 들어간다는 전망이다.
이러한 한보의 터무니없는 계산에는 세간에서 말하는.믿는 구석'이 포함돼 있다.특정 개인이 아니더라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경제 전반의 도덕적 황폐 현상을 볼모로 삼을 수도 있다..망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인식이 금융기관에도 퍼져있 음을 부인할 수 없다.그게 아니면 바로 한달 전까지 그 엄청난 자금을 대출해주었을 리가 없다.부도 직전에도 재경원과 청와대의.처분'을 기다렸다지 않은가.
결국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아무리 커도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그것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을 때만 가능하다.인수.합병(M&A)도 기업의 정리.해산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80년대말미국정부가 대외경쟁력이란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시장개입에 나서긴 했지만 어떤 분야에 어떤 투자를 하라고 기업에 지시하는 일은 없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산업정책'은 이제 폐기해야할 구시대 유물이 아닐까.
(본사 전 문위원) 권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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