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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조 ‘직밴’ 홍대클럽에 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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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일주일의 시작은 일요일일까, 월요일일까? 아침마다 교통지옥을 뚫고 일터로 나가는 직장인에게 답은 월요일이다. 그럼 주말은 피곤함을 털어 버리는 날일까,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날일까? 이 역시 후자가 답이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일주일을 신나게 열기 위해 노래하고 연주하는 직장인들이 있다. 주인공은 직장인 밴드, 모비션이다.

토요일 오후 2시. 장소는 서울 안국동 현대 사옥 뒷골목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다. 사실 말이 스튜디오지 스펀지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허름한 실내는 어른의 보폭으로 여섯 발자국이면 벽에 코를 박게 될 만큼 협소하다. 앰프와 악기를 연결한 선들이 뱀처럼 꿈틀대는 바닥 위로 여러 사람의 발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청바지에 후드 티, 잘 신지 않아서 새것 같은 운동화. 누군가는 흰색 긴 팔 티셔츠에 초록색 반팔 티셔츠를 겹쳐 입고 보라색 니트 모자까지 썼다. 추운 날씨를 피해 지하로 숨어든 모기들이 날아다니는 실내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쉬면 진공 상태가 될 만큼 답답하지만 둥둥, 퉁퉁, 쟁쟁, 뿅뿅. 악기를 튜닝하는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어느새 연주는 시작되고 누군가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한다.

“내 기타 소리 너무 큰 거 아닌가?” “괜찮은데.” 첫 곡이 끝나자 진지했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보이면서 수다 소리가 들린다. 단 한 명뿐이었던 관객이 비로소 밴드의 얼굴을 보게 된 것도 이때다. 음? 보라색 모자 아래로 주름이 꽤 보인다. 대학생…, 아니었네!

현대모비스의 사내 밴드 모비션(MOBICIAN)이다. 모비스(Mobis)에서 음악 하는 사람들(Musician), 모비션은 2003년 당시 회장이었던 박정인 고문의 아이디어로 처음 결성됐다. 초기 멤버는 학창 시절 밴드를 했던 직원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동아리 문을 두드린 이도 여럿. 현재는 총 9명의 멤버로 구성돼 있다. 남자가 7명, 여자가 2명. 흥미로운 것은 1970년생부터 86년생까지 띠동갑을 훨씬 넘는 나이대다. 그러나 연장자에 대한 호칭은 선배·형·오빠 세 가지뿐이다.

“우리끼리는 모비션을 정의할 때 실력보다 근태가 좋은 밴드라고 합니다.” 현재 팀의 회장을 맡고 있는 정승주(30·베이스)씨는 격의 없이 편안한 팀의 분위기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연습시간 출석률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멤버가 모두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정하는 것이 팀 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 “결국 음악은 매개체일 뿐 사람이 좋고 그 시간이 즐거워 매주 이렇게 반사적으로 모이는 거죠. 회사에서는 어려웠을 장난도 선배들이 잘 받아주니까.”

사정에 따라 변하기는 하지만 정기 연습시간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다. 직장인에게 황금 같은 주말을 이들은 이렇게 음악과 함께 보내고 있다. 팀의 최고 연장자이자 ‘유부남 클럽’의 맏형인 이승우(39·보컬) 과장은 주저 없이 “모비션은 다음 일주일을 위한 에너지 재충전소”라고 말한다. “애도 둘이나 있는 가장이 토요일마다 밖으로 나가니 아내도 처음에는 불만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아내가 먼저 등을 떠밀어요. 모비션에 갔다 오면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일요일이면 아이들과 자신에게 더 충실해진다는 걸 안 거죠.”

오늘의 연습은 12월 6일에 열릴 제4회 정기공연 준비로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장소는 홍대 앞 클럽 ‘프리버드’. 150여 명 정도의 관객을 예상하고 있다. 티켓은 대학 시절 ‘일일호프’ 때처럼 멤버들의 인맥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별 부족함을 못 느꼈는데 이번에는 살짝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든다. 모비션이 꽤 ‘떴기’ 때문이다. 7월 5일 열렸던 ‘2008 Mr.Luel 밴드 페스티벌’이 모비션을 스타로 만들었다. 30대 남성 라이프스타일 잡지 루엘이 준비한 경연대회에 참가한 30대 이상 직장인 밴드의 수는 100여 개. 동영상으로 예선을 치르고 본선에는 9팀이 올랐다.

심사위원으로 신대철·강산에·한동준 등이 참가했고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전태관이 진행을 맡았다. 공연장을 메운 관객 수는 2000여 명. 심사위원이었던 SBS 고민석 PD가 “지상파 음악방송보다 수준이 높다”고 평가한 열띤 무대에서 모비션은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사내에서도 관심과 격려가 쏟아지고, 부끄럽지만 어느 블로거는 ‘드디어 괴물 등장’이라는 표현을 썼더라고요.” 회장 정승주씨는 공연을 앞두고 고민이 또 있다.

경연 뒤풀이 자리에서 “이제 우린 동급이야”라는 말과 함께 멤버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주던 신대철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꼭 불러 달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될까, 아마추어 밴드로서는 유명 뮤지션과의 약속이 아직 실감이 안 난다.
모비션의 공연은 밴드의 열정이 폭발하는 무대이면서 동시에 멤버들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산타의 선물자루다. 지금껏 공연 수익금을 불우이웃 돕기에 써왔던 것. 지난해에는 이승우씨 모교에서 장애인 부모님을 둔 중학생 남자 아이가 음악을 하고 싶어한다는 사연을 듣고 매주 불러 함께 연습하고 연말 공연에도 함께 섰다.

“놀러 오세요.” 누군가 내미는 티켓 위에는 양복을 입은 멤버들의 얼굴이 하나씩 박혀 있다. 티켓 속의 얼굴들은 어엿한 ‘직장인’. “무대에 서면 어머니도 몰라보시더라고요.”
일주일의 시작이 아무 때면 어떤가. 다시 일주일을 힘차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게 중요하지. 남들에게는 아마추어지만 스스로에게는 어떤 뮤지션보다 위대한 ‘직밴’ 모비션의 토요일은 또 이렇게 저물어 간다. 오, 즐거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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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직밴 양성소
2007년에 출범한 직장인 밴드 동호회로 프로부터 초보까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새로운 전환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직장인 밴드 형성을 돕는 것은 물론 악기 레슨도 실시한다. 월회비는 5만원. 현재 가입 회원은 2200여 명. 온라인·오프라인에서 맹활약 중이다. 회원 가입은 mule.cyworld.com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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