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음의 눈을 열어준 킹 목사와 오바마의 연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8호 34면

“진보의 미국도, 보수의 미국도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의 미국도, 백인의 미국도, 라틴계 미국도, 아시아계 미국도 없습니다… 우리는 붉은 미국 또는 푸른 미국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합중국을 위해 일합니다.”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오바마의 전매특허 연설 글귀들이다. 얼마 전 오바마의 수락연설을 들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제시 잭슨 목사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만 울컥 울고 말았다. 정작 우리나라 선거에서는 한번도 흥분조차 해 본 일이 없건만 남의 나라 선거 결과에 눈물까지 흘리다니.

미국은 내게 싫건 좋건 참으로 특별한 나라다. 20대 중반에 도미하여 40이 될 때까지 내 청·장년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던 1980년대 중반 어느 날 길을 걷는 나에게 설문조사를 하는 학생이 다가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셋을 대라는 것이었다. 불쑥 들이댄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다음 세 사람의 이름을 내뱉었다. 마틴 루서 킹, 아서 애시, 줄리어스 어빙. 모두 흑인이었다. 중학교 시절 용산 미군부대 앞을 지나며 흑인 미군 병사의 뒤통수에 “야, 이 깜둥이 놈아”라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치곤 하던 내 입에서 나온 대답치곤 너무도 뜻밖이었다.

에이즈에 감염된 많은 이가 수혈을 탓하지만 그걸 믿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US오픈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테니스 선수 아서 애시가 감염된 피 때문에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덩크슛을 개발하여 농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코트의 신사 줄리어스 어빙의 별명 ‘닥터 제이’는 내가 학생들로부터 제일 듣고 싶어하는 별명이다. 검붉은 입술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유난히도 흰 치아를 보고 있노라면 검은 피부 밑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슬프도록 희고 고운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실제로 타임머신이 만들어졌을 때 가장 돌아가 보고 싶은 때를 묻는 설문에 응한 적이 있다. 나는 서슴없이 63년 8월 28일 워싱턴으로 가고 싶다고 답했다. 마틴 루서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바로 그 현장에서 듣고 싶다. 그의 연설은 녹음된 상태로 들어도 내 온 몸의 피가 솟구치는데, 그의 육성으로 직접 들으면 그 감동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코끝이 시리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신의 모든 자손, 흑인과 백인, 유대인과 이교도, 개신교도와 가톨릭 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그날이 말입니다. 드디어 자유, 드디어 자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나이다!”

68년 마틴 루서 킹이 암살된 지 꼭 40년 만에 미국은 아예 흑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흑인 지도자 부커 워싱턴을 백악관 저녁식사에 초대한 사건이 백인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제는 흑인 대통령의 식탁에 백인이 초대받게 되었다. 미국은 진정 아름다운 나라다.

인간은 지극히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동물이다. 동양 문화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종종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을 떠받든다. 하지만 모름지기 지도자, 그중에서도 정치 지도자라면 우선 말부터 잘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 중에는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이 말하는, 인간이 가진 네 개의 눈 가운데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은 그렇다 치더라도 육안(肉眼)과 뇌안(腦眼)조차 제대로 열어주지 못하니 답답할 뿐이다.

오바마는 그야말로 현하구변(懸河口辯),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을 잘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신언서판(身言書判), 용모와 언변 그리고 글재주와 판단력까지 고루 갖춘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쏟아낸 화려한 말들이 행동으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