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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간 좌부동한 채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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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1일 오후 2시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월정사. 도량은 고즈넉했다. 바랑을 짊어진 스님들 세 명이 선원 앞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튿날이 바로 동안거가 시작되는 결제일(음력 10월15일)이었다.

앞으로 석 달, 스님들은 산문 출입을 금한 채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메아리도 없는 물음을 자신을 향해 던질 것이다. 때로는 폭풍으로,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화살로 물음은 자신을 때릴 것이다.

선원 앞에서 만난 월정사 주지 정념(正念·52) 스님은 “참선의 시간은 하늘이 무너져도 좌부동(坐不動)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쉽진 않다. 하늘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앉아서 ‘이 뭐꼬’만 되뇔 수 있을까.

바랑을 멘 스님들이 동안거에 들어가기 위해 오대산 월정사를 찾았다. 스님들은 12일 월정사 주법당인 적광전에서 동안거 결제 법회를 한 뒤 만월선원에서 석달 간 안거에 들어갔다.


정념 스님은 되려 물음을 던졌다. “발심과 깨달음, 둘 중에 무엇이 어렵다고 보십니까?” 답이 없자 스님은 빙긋이 웃었다. “사람들은 깨달음이 어렵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발심이 어려운 겁니다. 정말로 간절한 발심이 있다면 깨달음은 절로 오겠죠. 그래서 간절함의 ‘절(切)’자에 마음을 모으는 겁니다.”

월정사 선방 이름은 ‘만월선원(滿月禪院)’이다. 밤이 됐다. 산중이라 사방이 캄캄했다. 그 어둠을 뚫고 달이 떴다. 보름달이었다. 만월선원 위로 만월이 올랐다. 승가에서 깨달음은 종종 ‘달’에 비유된다.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했다. 석 달의 안거, 수좌들은 내 안의 숱한 손가락을 찾아낼 것이다. 그걸 꺾고, 꺾고, 또 꺾을 것이다. 그렇게 손가락을 꺾으며 달을 찾을 것이다.

날이 밝았다. 산사에는 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렸다. 오대산 안의 여러 사찰과 암자의 스님들도 월정사 주법당인 적광전을 찾았다. 오전 11시, 동안거 결제 법회가 열렸다. 월정사를 비롯해 말사인 상원사, 지장암 등에서 100여 명의 수좌가 모였다. 각수 스님(상원사 청량선원 선덕)은 결제 법문 대신 ‘1935년에 했던 한암 스님의 법문’을 대중에게 던졌다.

“참으로 법문이라 하는 것은 무설무문(無說無聞)이 진설진문(眞說眞聞)이 되는지라. 상승법문과 종승법문은 불조께서 출현하시기 전에 설해 마쳤고, 오대산이 생기기 전에 설해 마쳤고, 상원사가 건립되기 전에 설해 마쳤고, 대중스님이 오시기 전에 설해 마쳤다. 그러므로 무설무문이 참으로 법문을 듣는 소식이라. 그러니 내가 무슨 법문을 설할 것이 있으며, 대중이 무슨 법을 들을 것이 있겠는가.”

적광전에는 침묵이 흘렀다. 동안거에 들어가는 100여 명 스님의 눈에는 간절함의 ‘절’자가 비쳤다. 한암 스님은 ‘무설무문(無說無聞)’이 참법문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말하는 나, 듣는 나를 여의라는 뜻일까. 그렇게 ‘나’를 여읜 자리에선 누가 보고, 누가 듣고, 누가 뛰고, 누가 말하는 걸까. 그걸 보라는 걸까.

73년 전의 법문인데도 ‘울림’은 여전했다. 적광전에 앉은 수좌들은 저마다 주장자로 한 대씩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한암 스님의 법문 말미에는 시도 한 수 끼어 있었다. ‘낙화는 적적한데 산에서 우는 새여 / 버들은 청청한데 물을 건너는 사람이여.’

법회를 마친 수좌들은 적광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줄을 지어 선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혔다. 댓돌 위, 수좌들이 벗어놓은 털신만 가지런했다. 그 위로 바람이 불었다. ‘나’를 찾는 오대산의 찬 바람이 불었다. 

평창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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