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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만 보면 도망가던 아들, 호랑이 놀이로 마음 열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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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10면

민노당 강기갑 대표가 경남 사천 자택에서 셋째 소화(10)양, 막내 금필(5)군과 함께했다. 맏아들 주원(16)군과 둘째 주호(14)군은 국내 첫 대안학교인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주원군과 소화양은 가수, 주호군은 농부, 금필군은 포클레인 기사가 되는 게 꿈이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강 대표가 막둥이를 업고 ‘호랑이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 사천=최정동 기자

“어, 금필이냐? 아빠 내일 갈게. 또 호랑이 놀이 할까? 아빠도 우리 금필이 보고띠퍼.”

‘투사’ 강기갑이 한없이 여려질 때

4일 오후 10시20분 국회 의원회관 227호. 연노란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갖춰 입은 강 대표의 혀 짧은 소리가 낯설다. 늦은 밤 긴 인터뷰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던 모습이 다섯 살 막둥이 목소리에 무너진다.

국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금필이는 돌쟁이였다. 잦은 단식투쟁과 농성, 바쁜 의정 생활로 한 달에 한 번 내려가기 힘들 때가 많았다. “아빠가 보고 싶다”던 어린 아들이 막상 아빠를 보면 밀치고 도망가는 게 그리움과 원망이 쌓여서라는 걸 1년 전 상담을 받고서야 알았다.

그 뒤론 잠깐이라도 집에 들르면 금필이를 등에 태우고 “어흥” 하며 ‘호랑이 놀이’를 한다. 양 무릎에 수건을 칭칭 감아 테이프로 붙이고 온 집안을 네 발로 기는 아버지에게 금필이는 마음을 많이 열었다. 5일은 금필이에겐 ‘아빠 오는 날’이지만 강 대표에겐 2차 공판일이다. 재판이라도 있어야 집에 들를 수 있는 원내 제4정당의 대표에게 질문을 던졌다.

“투쟁만 하면 누가 민노당 좋아하겠나”
-원내대표에다 현역 의원으로는 처음으로 민노당 대표를 맡았다.
“재선은 권영길 의원과 나밖에 없는데 권 의원 건강이 좋지 않아 내가 원내대표를 맡았다. 사실 내가 당 대표를 하는 건 맞지 않다. 처음엔 못한다고 했다. 내가 농민운동은 30년 했지만 17대 때 (당에) 처음 들어와 당에 대해 너무 모른다. 나는 NL(자주파)이 뭔지, PD(평등파)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대중적 인기 덕에 당 대표가 된 것 아닌가.
“아니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당 대표를 맡으라고 했겠나. 하지만 지지도만 좀 올리고 표 좀 얻고, 이런 식은 안 된다. 정당이 표를 의식하면 당리당략에 휘둘리는 거다.”

-강 대표가 농민인데도 10일 시작되는 쌀 직불금 국정조사 특위에서 빠졌다.
“솔직히 속상했다. 쇠고기특위 때 민노당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친박연대 차례라고 한다. 하지만 친박은 농수산식품위 등 관련 상임위 의원이 한 명도 없다.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이 교섭단체를 결성하면서 우리는 ‘낙동강 오리 알’이 됐다. 의견도 안 묻는다. 민주주의가 다수결 원칙이지만 소수 의견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게 전제 아니냐.”

-민노당 지지율이 5% 내외다. 의원 수도 17대 때의 반이다.
“대선·분당·총선을 겪으면서 국민에게 심한 회초리를 맞았다. 우리가 정말 반성할 부분이 있다. 국민 눈높이를 벗어난 ‘그들만의 이념적 논쟁’에 급급하고…. 민노당은 항상 투쟁을 위한 투쟁,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걸로 국민에게 보였다. 그러니 누가 우리 민노당을 좋아하겠나. 우리 편 아니면 적으로 보는 폐쇄적 성향도 없지 않았다.”

-당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건가.
“사람들이 민노당을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인정해주나? 안 해준다.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민노당이 왜 시위 현장에 다니는지도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우리는 소수 정당이라 정책을 바꿀 큰 힘은 없지만 가장 힘든 사람들 곁에서 위안을 주려고 현장에 가는 것이다. 민노당이 행복의 발전소가 되자고 했다. 만날 투쟁하는 모습 말고, 여유 있고 푸근한 모습으로 가야 한다. 앞으로 좀 그렇게 갈 거다. 살살(미소).”

-단식투쟁 등 강 대표도 강성 이미지다.
“사실 억울한 면이 있다. 이름도 강기갑이라 기갑부대도 연상되고, 을도 병도 아닌 갑이니까(허허). 수염까지 시커멓게 길러 인상이 그런데 사실 굉장히 마음이 여리다. 나는 강자한테만 강하다. 유일하게 내가 지는 강자가 있는데, 바로 아내다.”
강 대표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정당’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외부 인사 영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쉽지는 않아 보인다. 강 대표는 당 정책위의장직을 석 달 가까이 비워 두고 외부 인사 모시기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선거 나가면 이혼하겠다던 아내
5일 강 대표는 2차 공판을 위해 진주로 향했다. 공식 선거운동 개시일 하루 전날인 3월 8일 당원결의대회에 비당원이 다수 참석한 게 사전선거운동으로 고발됐다. 사천 주민들은 그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조정국(37)씨는 “당을 떠나 사람을 보고 찍었다”며 “쇠고기 파동 쪽에만 신경 쓴 것 같은데 이제는 지역 살림에 관심을 가지실 때”라고 말했다. 주부 이윤희(32)씨는 “운동하는 사람이라 싫었고 대표 하는 것도 반가운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이창훈(24)씨는 “강단 있고 바른 소리 해서 멋있다. 다음에 나오면 꼭 찍을 것”이라고 했다. 최민갑(74)씨는 “나도 농민이지만 그래도 힘있는 (한나라당) 사람이 돼야 지역이 발전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강 대표가 지역 선거에 나설 때 가장 말린 사람은 아내 박영옥(42)씨였다. “이혼하자고 했어요. 국회의원 되면 이런 덕 저런 덕 본다고들 했지만 우리는 국회 간 지 2년 만에 집안이 망할 지경이 됐는데….”

강 대표는 원래 젖소 100여 마리를 길렀다. 김영삼 정부 때 농가 규모를 키워야 지원해주는 정책 때문에 빚을 내 농장을 차렸지만 외환위기로 빚만 고스란히 남았다. 현재 그의 농가 부채는 4억5000만원이다. 강 대표가 국회에 가면서는 그때까지 보조 작업만 하던 아내가 네 남매를 혼자 키우며 젖소를 돌봤다.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제가 수의학적 지식이 없다 보니 돌쟁이 들쳐 업고 발을 동동 굴러도 소가 자꾸 죽어 나가는 거예요.”

젖 짜는 솜씨도 서툴러 우유 생산량이 계속 줄었다. 우유를 휘젓는 프로펠러 높이까지도 우유량이 안 돼 기계를 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결국 지난해 남은 소를 다 팔았다. 매달 약 1000만원의 세비가 나오지만 민노당 의원들은 230만원만 받고 나머지는 당비로 낸다. 그나마 180만원에서 지난해 3월 50만원 올랐다.

이혼하자는 아내 앞에서 강 대표는 “저 농민들은 어떡하느냐”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젠 내 남편이 아니구나’는 생각에 아내는 홀로 찜질방을 찾아 캔맥주를 마시며 이틀을 울었다. 선거를 치르면서 아내는 8㎏이 빠졌다.

아내는 6.6㏊ 규모의 ‘흙사랑 농장’에서 감나무 120그루, 매실나무 1000여 그루를 키운다. 밤나무도 있지만 1㎏에 800~1000원꼴이라 아예 줍지 않는다. 유기농법으로 키우는데 올해는 유난히 가물었는 데다 선거 때문에 잘 돌보지 못했다. 지난해 감 250상자를 수확했는데 올해는 열아홉 상자다. “일흔넷 되신 친정 아버지께서 서울 봉천동에서 한 달에 열흘씩 내려와 농사를 거들어주셨는데….”

강 대표는 이날 재판을 마치고 오후 7시30분이 돼서야 집에 들렀다. 금필이와 ‘호랑이 놀이’를 잠깐 하고 30분 만에 서울행 마지막 비행기를 타러 떠났다. 아이들은 다음 공판일에나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소화(사천초 4년)가 ‘아빠에겐 한 번도 못한 말’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도로 농부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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