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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식문화가 유행시킨 불쌍한 폭탄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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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왜 폭탄주를 마십니까?” “양주만 마시면 독해서요.”

한국 현대사에 폭탄주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첫 순간이었다. 1999년 국회 청문회가 텔레비전 생중계되는 가운데 국회의원이 묻고 검찰 간부가 답변한 말이다. 당연히 국회 속기록에도 남았을 텐데, 아쉽다. 양주만 마시면 독해서 폭탄주를 마신다? 빈약한 답변이다. 필자는 검찰 출입 기자를 오래한 경력으로 그 검찰 간부를 아는데, 그는 술도 잘 마시고 나름 유머도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건과 연루돼 폭탄주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정말 폭탄주라는 술에 대한 얘기였다면, 더 재밌고 명쾌한 답을 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봐도 한심한 건 질문이지 답변이 아니다. 그 청문회는 이 검찰 간부가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다가 “검찰이 조폐공사의 파업을 유도했다”는 발언을 했고, 이게 보도가 돼 일었던 파문에 관한 것이었다. 문제는 발언 내용의 진위이고, 혹 그 발언을 한 데 다른 저의가 있었는지 궁금했다면 그걸 물을 일이다. 아들이 술 먹고 사고치고 오니까 부모가 “왜 술 쳐먹고 그래?” 하는 식으로 따져 묻는, 이런 질문은 질문도 아닐 뿐더러 공인이 공인에게 할 말이 아니다. 그 물음 앞에서 “양주만 마시면 독해서”라고 즉답을 한 것은, 청문회장에서 듣기 힘든 고급스러운 유머가 아닐 수 없다.

여하튼 폭탄주는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현대사에 등재됐다. 그 이듬해인 2000년에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가 나왔다. 한국 최다 관객을 동원한 ‘괴물’의 봉준호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거기에 폭탄주 돌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주인공은 국문학 박사이면서 강의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백수다. 교수가 되려면 학장에게 돈 1500만원 싸 들고 가서 건네주면서 술 접대를 해야 한다는 선배의 충고를 듣는다. 그 선배의 입을 통해 주인공보다 선수 쳐서 학장에게 돈 싸 들고 갔던 한 친구의 얘기가 나올 때 화면은 그걸 재현한다. 룸살롱에서 머리 하얀 학장이, 맥주에 양주를 타서 잔을 돌려 회오리를 일게 하는 폭탄주의 일종인 회오리주를 만든다. 그러고는 잔을 감싸 쥘 때 썼던 휴지를 벽에 내던진다. 이걸 앙각에 클로스업에 슬로모션으로 그로테스크하게 연출한다. 이 친구는 술을 못하는 이였다. 학장이 주는 회오리주를 다 받아 마시고는 취해서 지하철 철로 쪽으로 머리를 내놓고 오바이트하다가 지하철에 치여 죽었다.

다음은 주인공 차례. 학장이 회오리주를 만드는 모습이 똑같이 그로테스크하게 리플레이된다. 먼젓번에는 웃겼지만, 이번엔 조금 공포스럽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공도 지하철에서 똑같은 포즈로 오바이트를 한다. 하지만 술이 조금 더 셌던 덕에 그는 살아서 교수가 된다. 여기서 회오리주·폭탄주는 뇌물 거래가 성사됐음을 알리는 징표다. 맥주잔 속에 양주와 맥주가 섞여 돌면서 일으키는 거품의 회오리가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대가로 주어지는 찰나적인 쾌락을 은유하듯.

불쌍한 폭탄주! 이 영화 이후에도 폭탄주는 불명예의 행진을 계속해야 했다. 국회의원들이 폭탄주 마시고 추행하고, 폭언하고, 폭행하고….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폭탄주와 관련된 사고 때문에 국회에선 ‘폭탄주 소탕 클럽’까지 만들어졌다. 곤욕을 치렀던 국회의원들에겐 성경의 한 구절이 절실할지 모른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술이 죄냐, 사람이 죄냐. 어려운 문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언젠가부터 한국인이 폭탄주를 죽어라고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조금 보태면 폭탄주는 80년대 중반에 군·검찰에서 시작돼 90년대 초반 정계와 언론계로, 90년대 중반부터 일반 기업으로 퍼져나가 ‘플란다스의 개’에서처럼 강단까지 잠식했다. 누군가는 폭탄주가 군사문화의 잔재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룸살롱이 그 유행의 진원지라고도 한다. 다 일리가 있지만, 내 경험에 비춰 한국의 회식문화가 폭탄주의 유행을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회식은 파티와 달리 좌석 이동이 쉽지 않다. 대화가 개별적으로 이뤄지기보다 집단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면 여럿이 말하기보다 회사나 조직의 상사가 웅변하기 십상이다. 상사가 부하직원들 놀라고 마련해 놓고는, 실제로는 노는 것까지도 상사가 관장하는 피곤한 자리가 될 수 있는 게 회식이다.

이런 자리는 어차피 과음을 필요로 하는데, 잔술을 주고받는 것보다 폭탄주를 돌릴 때 상사는 상사대로, 부하는 부하대로 이점이 있을 수 있다. 잔술을 주고받으면 상사가 많이 마시게 되는데 폭탄주는 공평하게 돌아가니까 상사의 입장에서 술을 덜 마실 수 있다. 또 폭탄주는 제조하느라, 돌리느라, 마시고 난 뒤에 박수 치느라 시간을 끌기 때문에 얘기할 시간이 줄어들게 한다. 부하들의 입장에서 폭탄주는 자기 차례가 됐을 때 싫어도 먹게 하는 술의 ‘강권’은 있지만, 상사 혼자 떠드는 ‘강변’이 줄어드니 술 맛은 좋아질 수 있다.

군사문화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상명하복과 일치단결을 필요로 하는 한국의 조직 문화 속에서 폭탄주는 조직 구성원들이 바뀐 여건에 맞춰 스스로 불러들인 음주 방식인지도 모른다. 집단적 문화의 압박이 있으면서도 나름 공평한 구석이 있고, 무엇보다 말을 덜 하게 함으로써 개인의 울타리를 조금은 더 보호할 수 있게 하는. 물론 과음으로 인한 사고는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 폭탄주 찬반론은 이 글이 다룰 대상이 아니다.

‘플란다스의 개’에도 그런 구석이 있다. 교수가 되려고 뇌물을 바치는 주인공뿐 아니라, 남이 애지중지하는 개를 잡아먹는 노숙자와 아파트 경비원, 젊음을 쏟아 부을 대상을 못 찾고 부유하면서 남의 개 찾아주는 데 헌신하는 아파트 관리소 여직원 등등이 어떻게 보면 지리멸렬하고 어떻게 보면 귀엽기도 하지만 영화는 재단하지 않는다. 충분히 살피기보다 재단하고 심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의 한 속성을 이 영화는 경계하는 듯하다. 현상을 보여주되 재단하고 결론을 내야 할 시점에서 발을 빼는 건 ‘살인의 추억’ ‘괴물’ 등 이후 봉준호 감독 영화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폭탄주로 돌아와 맥주에 위스키를 섞은 술, 하나의 칵테일로서 폭탄주의 맛을 살리려면 맥주의 거품이 충분히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릿한 냄새가 난다. 거품을 일게 하기 위해 회오리를 만들고, 얼음을 넣어 젓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양주를 적당량 넣은 양주잔을, 맥주를 채운 맥주잔에 떨어뜨리되 양주잔이 떨어지면서 맥주잔의 측면을 살짝 건드리도록(많이 건드리면 맥주잔이 깨진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유거품처럼 고운 거품이 정말 폭탄 터지듯 풍성하게 올라온다. 그렇게 만든 폭탄주에선 비린내는커녕 우유 맛이 난다. 그리고 또 하나. 폭탄주는 말이 그리울 때보다, 말에 지쳤을 때 마시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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