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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143년 만에 끝난 남북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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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의 3억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은 13%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소수, 변방 인물이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됐으니 세계가 놀라고, 미국에 찬사를 보내는 게 당연하다.

선거에서 나타난 수치를 보면 변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흑인의 95%가 몰표를 던졌고, 히스패닉 67%, 아시아계 62% 등 소수민족들이 절대 지지를 보냈다. 백인 중에서도 43%가 오바마를 지지한 것은 놀라운 변화다.

주목할 수치는 더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는 93%라는 압도적인 득표를 했다. 21만여 명이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고, 매케인을 지지한 사람은 1만4800여 명(7%)에 불과했다. 오바마는 모든 계층에서 지지를 받으며 역대 최다 득표를 한 미국 대통령이 됐다.

이제 선거도 이틀이 지났으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살짝 한 발 떨어져서 보자.

오바마의 당선이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된 것은 그만큼 가능성이 적었다는 방증이다.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온다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힘들 거야’라는 상식(?)이 깨졌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그의 칼럼에서 “143년에 걸친 남북전쟁이 이제야 끝났다”고 쓰고 있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남북전쟁도 북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는 얘기다. 그리고 오바마의 당선으로 비로소 끝났다는 의미다. 여론조사에서는 흑인을 지지한다고 하다가 투표에서는 백인을 찍는 경향인 ‘브래들리 효과’는 이번 선거에서 없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버핏 효과’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백인들이 오바마 뒤에 있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을 보고 투표했다는 말이다. ‘경제 살리기’가 ‘흑인 대통령’보다 더 큰 관심이었다는 해석이다.

미국에서는 ‘오바마의 암살 가능성’에 대비해 경호를 더욱 강화했다고 한다. 실제로 선거 전 다이넬 코워트(20)와 폴 슈레셀만(18)이라는 신나치주의자들이 체포됐다. 이들은 오바마를 비롯해 100명이 넘는 흑인들을 살해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악명 높은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Ku Klux Klan)가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오바마가 당선되기 무섭게 벌써 인터넷에 ‘오바마 탄핵’ 사이트가 개설돼 가입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도 들린다.

그렇다면 오바마의 당선이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을 해소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맞다.

 우리는 오바마와 미국을 보면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진화하는 미국’이다. 달리 표현하면 ‘발전의 방향’이다. 방향만 잘 잡는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꿈은 이뤄진다는 것을 이번에 미국이 확인시켜줬다.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1776년 건국 이후 232년 만이다. 1865년 노예제 폐지 이후 143년 만이며, 1963년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을 한 지 45년 만에 이뤄진 일이다.

대한민국은 올해로 건국 60주년을 맞았다. 독재와 군사정권의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60년 동안 이뤄낸 일을 한번 보자. 경제적으로는 OECD 국가가 됐고, 선거혁명으로 민주주의 발전도 이뤘다. IT 강국에다 스포츠도 세계 10위권이다. 그 짧은 기간을 보면 결코 미국이 부럽지 않다. 그 역동성과 가능성을 보면 오히려 미국보다 나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서’와 ‘좌-우’ 대립 문제다.

우리가 ‘망국적’이라고 표현하는 지역감정도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비하면 오히려 약하다. 좌절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풀리는 쪽으로 노력 한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이미 철 지난 이념대립이 유독 한국에서, 특히 젊은 세대와 어린 세대에서 심화되고 있는 것은 완전히 방향을 거꾸로 잡은 경우다. 남들은 앞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우리만 뒤로 달리는 꼴이다. 이념의 늪에서 빨리 빠져나오지 않으면 143년이 걸려도 해결할 수 없다. 이념과 싸울 때가 아니다.

손장환 디지털뉴스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