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경제위기에 다산을 떠올린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쓴 책으로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라는 희대의 명저가 있다. 그를 이해하고 보호해 주던 정조가 죽자 1801년부터 만 18년간의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는데 그 기간 동안 다산이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논어고금주』도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완성(1813)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의 고경은 한나라 때의 해석을 고주(古注)라 하고, 12세기 남송 때 복건성 사람 주희(朱熹·1130~1200)가 새롭게 송나라 선학들의 해석을 모아 집주(集註)를 내었는데, 그 주희의 집주를 보통 신주(新註)라고 부른다. 『논어』의 경우 고주는 아무래도 고경의 전반적인 제도문물에 기초하여 그 언어를 해석한다. 그러나 신주는 그 언어가 우리 삶에 던져주는 의미를 중심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의리지학(義理之學)이라고 부른다.

다산은 고주와 신주, 어느 곳에든 치우치면 『논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보고 신·고를 망라해 자기의 새로운 해석을 수립하려는 매우 야심찬 기획의 일환으로서 『논어고금주』라는 방대한 작품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다산이 그러한 작품을 쓰게 된 실제적 계기는 엉뚱한 충격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강진은 촌구석이다. 그런데 그 촌구석에서 귀양 간 사람이 방대한 저술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에 속한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학술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그런데 다산에게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해남 윤씨였는데, 그 윤씨 종가에는 윤선도 시절부터 축적되어 내려온 방대한 장서가 있었다. 다산은 유배지 초당에서 그 도서들을 활용했다.

어느 날 다산은 일본통신사로 왕래하던 윤씨 일가로부터 책 한 권을 선사받았다. 그것은 에도(江戶)의 유자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1680~1747)의 『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이라는 방대한 서물이었다. 다산은 이 책을 들춰보는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남의 나라나 노략질해 먹고사는 칼잽이 나라라고만 생각했던 다산에게 이 책이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다산이 생각했던 중국 고래의 고주와 신주를 모두 망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에도 유자들, 특히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1627~1705)나 고학(古學)의 대가 오규우 소라이(荻生<5F82>徠·1666~1728)의 학설을 소개하면서 자유롭게 한당유나 송유를 비판하고 자기의 설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이 슌다이의 『고훈외전』을 모델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은 외쳤다. “이 정도로 일본 사무라이들의 문(文)이 무(武)를 승(勝)하게 되었다면 이제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할 염려가 없어졌다.” 매우 나이브한 판단이기는 했지만 다산의 학문적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방증해 주는 결정적 단서이다.

나는 동경대 유학 시절에 토가와(戶川芳郞) 선생의 세미나에서 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을 접하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소라이는 주자의 『집주』를 불교의 아류로밖에 간주하지 않는다. 송유의 의리지학은 관념의 유희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라이의 주희 비판은 그 레토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치열한 자기 주장 속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논어』를 우리 실존적 삶에 의미를 주는 관념적 도덕적 격언 따위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왕지도(先王之道), 즉 중국 고래의 이상적 예악형정의 정치질서의 제도를 구현한 메시지들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고경(古經)에 준거해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서(四書: 논어 · 맹자 · 중용 · 대학)를 가지고 육경(六經: 시 · 서 · 예 · 악 · 역 · 춘추)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육경으로써 사서를 해석할지어다!

나는 1982년에 귀국해 곧바로 일본 유학을 강의했는데 나 이전에 에도 유학을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정확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나보다 근 2세기를 앞서서 강진의 촌구석에서 다산이 소라이의 경학과 씨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경악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학계의 현실은 다산의 개방적 자세나 그 자료의 범위에도 미치고 있질 못하다. 최근 기원전 자료인 백서(帛書)나 죽간(竹簡) 문헌이 대량 출토되어 중국 고대사상의 연구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고, 일본·중국의 학자들은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데 한국의 학자들은 이러한 연구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아직도 에도 유학의 전문가도 거의 없다.

다산은 소라이를 50회나 인용하고 논박하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다산은 소라이의 『논어징』이라는 책을 통째로 보질 못했다. 슌다이가 인용하고 있는 소라이만 『고금주』 속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대륙의 고금주를 망라하면서 자기의 체계를 수립하려는 다산이 섬나라 일본의 유학자들에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정직하게 그 가치를 형량하고 있었다는 것은 현금 우리나라의 식자들에게도 자성(自省)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곧 미 대선의 결과가 발표될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러한 소절(小節)에 관하여 내가 함부로 단언할 입장은 아니지만 나는 항상 근원적인 문제가 우리 자신의 내면적 실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산이 19세기 초에 이미 대륙과 섬나라, 동아시아 전체를 망라하여 자신을 개방하며 웅지를 펼쳤듯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실로부터 본질적인 개선책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 당대에도 유학자들은 주자학 정통주의에 빠져서 사문난적만 때려잡고 있었다. 순조 이후로 계속되는 세도정치로 결국 조선왕조는 몰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방임적 시장경제가 더 이상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상적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 이 마당에, 이 세계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다산처럼 마음 열고 배우기를!

도올 김용옥

[J-HOT]

▶ 투표 시작 하자마자 '우르르'…"엄청난 기록"

▶ "오바마에 줄 대라" 홍정욱-송영길에 기대

▶ 현대차 10월 사상최대 수출, 美판매 31% 급감 왜?

▶ "죽은 사람 가슴살·다리 근육 도려내어 알약처럼 삼켜"

▶ 상품투자 귀재 짐 로저스 "금보다 □ 사라"

▶ 고대-연대 총장 '품앗이 특강' 내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