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객관적 평가'란 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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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얼마 전 외국유학을 준비하는 졸업생이 추천서를 부탁하러 왔을때의 일이다.그 학생이“잘 써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에“나는 내가 평가한 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정색을 하면서“제가 외국 학생들과의 경쟁을 뚫고 이 대학에 입학하면 저한테도 좋고 아무도 손해보는 사람이 없는데 왜 좋게 써주지 못하십니까”라고 항의하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추천서에 대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이 학생의 생각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서로 아는 사이이니 모자라는 점이 있더라도 좋게 좋게 써 주는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추천서를 받아보는 입장에 서도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는지 회사의 입사원서에 붙어있는 지도교수 추천서라는 것은 매우 형식적이고 그나마 지원자 자신이 모두 볼 수있게 되어 있어서.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다'는 식의판에 박은 말밖에 쓸 수가 없다.그 러니 추천서는 단순한 요식행위일 뿐이고 출신학교나 시험성적등이 선발의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물론 정실에 의한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지표를 이용해 공정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대한민국의모든 국민에게 1년에 한번씩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대학입시에선 사소한 것까지 점수화해 0.1점 차이로 당 락이 결정되기도 한다.이와 같은 입시에서의 철저한 객관성 추구 노력은 그런대로 인정받고 국민들의 심정적 지지도 받고 있는 듯하다.우리 나라에서 권력이나 금력(金力)을 가진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자식을 원하는 대학에 입학시키는 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량적(計量的) 평가의 치명적인 약점은.질(質)'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예를 들어 자기 목숨의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학생이 있어도 소위 인성과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학교생활기록 부에선 양로원에서 휴지 몇번 줍고 도장 받아온 학생과 마찬가지로.봉사점수'에서 만점을 받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미국이나 서구에서 추천서를 중시하는 이유는 이러한 계량적 평가의 약점을 보완하고 객관적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특출한 능력과 자질을 알아보는 방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엔 추천을 하는 사람이 비록 주관적이지만 나름대로 공 정하게 평가한다는 전제조건이 있고 추천자는 이것을 하나의 사회적 의무로 여기고 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는 서로를 못 믿기 때문인지.객관적 평가'라는 우상(偶像)아래 계량적 지표를 이용한 평가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다.수십만명을 대상으로 하는 대학입시에선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공정한 주관적 평가가 가능한 집단을 대상으로 할 때도 점수표를 만들어 무조건 계량화하려고 한다.
가령 최근 유행하고 있는 대학평가의 예를 보자.미국의 경우엔각 대학 교수들이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명망도(名望度),교과과정의 충실도,졸업생의 수준등에 대한 전문가들의 주관적 평가가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비해 우리 나라는 교수 1인당 논문 수,학생 1인당 실험실 면적,졸업생의 취업률 등으로 계량화해 점수를 매기고 이것을 합산한 총점 순으로 서열화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도대체 1백수십여개의 대학에 순위를 매겨 일렬로 정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계량적 지표는.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평가를 계량적으로 하는 것은.질적 수월성(質的 秀越性)'을 추구하는 데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지나치게 계량화된 우리 나라 대학평가의 부작용으로 최근 교수의 업적 평가나 신규 채용심사에서 질(質)과 관계없이 무조건 발표논문의 편수만을 따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이러한 풍토에서는아인슈타인 같은 이는 한국 대학에 발붙이기 어려 울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도 몇몇 자연계 대학은 논문발표 수에서 외국의유수대학에 버금가는 수준까지 발전했다.그러나 그 수에 걸맞도록질(質)도 함께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질(質)을 중시하는 주관적 평가방법이 수용될 수 있는 풍토 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세정 서울대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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