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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스타일리스트>자전거 타고 대륙일주 신상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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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노래 가사대로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면 가끔 ‘나그네길이 인생’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신상환.올해 스물여덟의 한국남자.94년 10월22일 인천항을 떠나 중국을 거쳐 육로로 인도대륙·티베트고원·타클라마칸사막·고비사막을 여행하고 한국에 돌아온 것이 올해 10월31일.출발때 짐이라곤 옷·약·노트북 컴퓨터를 꾸려넣은 배낭 하나.늘어난 짐이라면 실크로드와 인도대륙의 역사·정치·문화에 대한 문고판 영문서적 20여권.그동안 총경비는 4백만원.싼 물가 뿐만 아니라 주요 이동수단이 트레킹·자전거였던 까닭이다.즉 튼튼한 두다리로 걷는데는 돈이 들지 않았고 인도에서 구입한 자전거로 달린 약 1만2천km의 여정 또한 사정은 엇비슷하다.

별의별 이야깃거리가 없을리 없다.고산병 증세에 허덕이며 가로지른 해발 5천m의 안나푸르나 설원,힌두교도와 회교도간의 내전의 총소리가 교향곡처럼 들려오는 인도국경지대,외국인 출입제한구역인 중국 내륙사막에서 엉성한 지도 때문에 1백㎞나 잘못 나아갔다 되돌아온 일.하지만 그는 결코 모험가는 아니다.‘길이 내 인생’인 여행가도 역시 아니다.차라리 ‘글이 내 인생’에 가까울 터이지만 그런 분류법보다 “내 인생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평생 이력서 안쓰는 것이 소원”같은 스스로의 표현이 그를 한결 잘 설명한다.

배낭여행을 하면서도 최소한 수세식화장실과 낯익은 패스트푸드점을 찾을 수 있는 런던·파리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물을 것이다.하필이면 인도냐고.설명은 첫번 여행으로 되돌아간다.93년 8월 아주대 환경공학과를 졸업하고 3일뒤 떠났던 석달간의 중국여행이었다.배낭여행 정보를 책으로 펴내자는 한 선배의 제안이 그에겐 기회였던 셈.중국 다음에는 그 너머 실크로드의 냄새를 맡았고,실크로드 한켠 파미르고원 너머에서는 인도대륙이 그를 붙잡았다.처음 반년가량 작정했던 여정이 인도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1년을 넘겼고,비자 때문에 한국에 다녀온 3주간을 제외하곤 바로 2년의 인생이 되었다.

무역로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문화의 교차로가 이어지듯 그의 삶속에서도 교차하는 문화경험이 읽혀진다.그 첫째를 들라면 ‘시대(時代)의 정의감(正義感)’을 품은 운동권 대학생시절.89년 아주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그는 임수경씨의 북한방문이 나라안팎을 발칵 뒤집어놓은 ‘평양축전’정국속에 국가보안법위반·집시법위반·도로교통법위반 같은 대여섯가지 죄명으로 2년 실형을 살았다.

둘째는 그럼에도 운동권 동료들은 눈치채지 못한 시(詩)를 쓰던 대학생시절.이 배경에는 그가 대부(代父)로 모시는 수학과 교수님,의형(義兄)격인 80학번 선배와 이룬 정체를 알 수 없는 ‘문파(文派)’가 숨겨져 있다.4백만원의 여행경비와 함께 ‘문화에 우월은 존재하지 않고,차이는 존재한다’는 화두를 던져준 후원자가 바로 그들이다.

더 거슬러 전남 광양. 진원평야를 끼고 도는 섬진강으로 더듬어 내려가면 문필에 대한 집착 불교와 한학의 전통이 지류처럼 흐르는 것을 읽게 된다. 거듭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떨어지면서도 실존주의문학과 시나리오작업에서 손을 놓지 못한 아버지,그림재주를 지닌채 출가한 큰형, 동네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

'문화에는 우월도, 차이도 존재한다'는 나름의 답을 들고 여행에서 돌아온 그의 화두는 이제 '문명'으로 바뀌어 있다. 화두니,인도니 하는 어감이 혹 선(禪)냄새를 풍긴다면 오해다. 1년 반 넘게 월간 '사회평론길'에 여행기를 연재해온 그의 수식어는 '국제 정치.역사 전문 르포작가'. 여행기 역시 이국 풍물기행보다 파키스탄.인도.스리랑카.네팔.티베트의 현재형 역사와 정치에 큰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여전히 그의 관심은 아시아여서 앞으로 한 6-7년 내다보고 중국에서 동아시아역사를 공부할 계획이다.

그의 생각에 문학과 보도의 가교격인 르포라는 글쓰기는 스스로 능력만 개척하면 프리랜서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분야로 보인다. 르포니,프리랜서니 하는 어휘에 현혹돼 2년여 여행의 성취감에 우쭐해하는 자신만만한 젊은이를 떠올리지 말기를. "이국 경험말고는 시를 쓰는 것이나 여행하는 것이나 느끼는 바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하는 이 젊은이에게는 '비참했던' 여행경험을 전리품으로 윤색하는 것도, '휴대폰에서 자동차까지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힌'삶을 주저없이 질타하는 백수의 자유를 과시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주 일본으로 떠나는 그의 여정에는 패기만만, 자신만만을 빌어줄 필요가 있다. 미래의 장인.장모에게 인도에서 만난 시즈미 미사토(25)와의 결혼을 승낙받으려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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