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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 펜화기행] 수원 화성 화서문과 서북 공심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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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1890년대의 화서문과 서북 공심돈, 종이에 먹펜, 43X58cm, 2008.

펜화로 옮기기 힘든 대상 중 하나가 벽돌 건물입니다. 수만·수십만 장의 벽돌을 보면 펜을 들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옵니다. 자랑스러운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는 온통 벽돌 건물 천지입니다. 벽돌이 돌로 쌓은 성벽보다 강한 점을 이용한 것이랍니다. 즉위 18년(1794)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읍치로 옮기고 화성 공사를 시작합니다. 설계를 맡은 정약용은 중국과 서양 성의 좋은 점을 취해 화성을 당대 최고의 성으로 만듭니다.

성문 앞에 옹성을 둘러쌓아 문을 부수려는 적을 등 뒤에서 공격하도록 했고, 성벽을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무찌를 수 있도록 치성과 포루, 각루와 돈대를 튀어 나오게 지었습니다. 노대와 공심돈을 높이 세워 감시 기능과 공격 기능을 강화했습니다. 공심돈은 조선 최초의 건물로 정조의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3층 건물 각 층에 총안을 두었고, 꼭대기에서는 적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습니다.

화성을 보면 ‘전투를 위한 성곽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위엄이 가득한 중국과 일본의 성곽과 다른 ‘선의 아름다움’으로 한국인의 미적 특성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곳 저곳 모두 멋진 그림이 됩니다만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옛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에 복원된 현재 건물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화서문 지붕 추녀마루 용두의 위치가 다르고, 잡상이 생겼습니다. 화서문 뒤편에 잘생긴 소나무도 살렸습니다. 서북 공심돈의 취두가 달라졌고, 지붕의 넓이가 늘어났습니다. 누각의 널판 문은 옛 사진에 없는 것을 현 건물을 참고했습니다. 귀중한 사진을 제공해주신 수원 윤의영님과 김건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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