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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인물 낳는 방은 따로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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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인물이 태어나려면 하다 못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오래된 상식이자 믿음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명문가에서 발견되는 산실(産室)이다. 산실이란 입태(入胎)와 출태(出胎), 즉 임신과 출산이 이루어지는 방을 가리킨다. 400~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문 대가집을 방문하다 보면 별도로 산실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 장소에서나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산실에서 아이를 낳아야 인물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산실은 지기(地氣) 내지는 지령(地靈)이 뭉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녀본 집안 가운데 인상 깊은 산실을 지니고 있는 집안은 세군데다. 안동의 고성 이씨(固城 李氏) 종택인 임청각(臨淸閣), 안동 내앞의 의성 김씨(義城 金氏) 대종택, 경주 양동마을의 경주손씨(慶州 孫氏) 대종택인 서백당(書百堂). 공통적으로 경상도의 남인 집안들이다. 충청도나 전라도에도 물론 산실이 있었겠지만, 필자가 산실에 얽힌 드라마틱한 사연을 알게 된 곳은 우연하게도 남인 집안들이다. 노론이나 소론 집안에 비해 남인 집안이 상대적으로 고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임청각은 낙동강이 집 앞으로 흐르고 있는 99칸의 대 저택이다. 경치가 화창한 늦봄에는 대문 밖에서 곧바로 배를 띄워서 낙동강 상류인 반변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크루즈 여행을 즐겼던 저택이다. 그만큼 낭만적인 풍광과 입지조건을 갖춘 집이다. 이 집에는 '우물방'이라고 불리던 산실이 남아 있다. 방 앞에 우물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임청각에서 태어난 유명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

약봉(藥峯) 서성(徐:1558~1631).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피난간 인물이다. 죽은 후에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약봉의 어머니가 고성 이씨였고, 해산달이 가까워오자 친정인 임청각의 우물방에서 해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다음에는 매산(梅山) 류후조(柳厚祚:1798~1876)가 우물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흥선 대원군 집정시에 좌의정을 지내면서 폐정개혁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1680년에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되면서 경상도의 남인들이 몰락했다. 이후로 200년 동안 경상도 남인들은 완전히 물먹어야만 했다. 지역차별로 재상급의 높은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류후조에 이르러서야 그 차별이 풀리면서 처음으로 좌의정에 올랐는데, 그 역시 고성 이씨인 어머니가 임청각에서 출산을 했던 것이다. 조선후기 경상도 푸대접의 한을 풀어준 사람이 류후조이기도 하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1858~1932)이 태어났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던 독립운동가다. 만주의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수염을 기른 석주선생의 풍모를 보면 대단히 호방하고 잘생긴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우물방에서는 석주를 포함해 만주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이봉의(李鳳義:1868~1937) 등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들이 태어났다. 말하자면 석주부터 시작해 내리 삼대가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물방의 정기는 독립투사를 배출하는 데 쓰인 셈이다. 왜정 때 이 소문이 경상도 일대에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일본인 학자 무라야마(村山智順)가 자신의 저서인 '조선의 풍수'에다 '3명의 재상을 배출한 영실'로 우물방을 소개하기도 했다.

안동대학교를 지나면 의성 김씨 대종택이 나온다. 현재 우리나라 집안 가운데 문중의 단합이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는 집안이기도 하다. 문중행사에 필요한 돈 1억~2억원을 걷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돈 많은 한 사람이 몽땅 내도록 하지 않는다. 집집마다 빠지지 않고 1만~2만원씩을 갹출한다. 모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혹시 돈을 안내는 집이 있으면, 종중 사람들이 서로 전화 연락을 해 반드시 내도록 만든다. 그만큼 열성적이다. 문중에 대한 프라이드가 없으면 이런 열성이 나오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그 프라이드의 발원지는 이 집의 산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 중기 이 집 산실에서 태어난 5명의 아들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을 비롯한 5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이 집은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으로 불렸고, 그 산실의 영험함에 대한 소문이 전라도에까지 알려졌다.

의성 김씨 내앞 대종택은 구조가 특이하다. 보통 한옥은 앞에 사랑채가 있고, 뒤쪽으로 안채가 있다. 그러나 내앞 대종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가 아닌 병렬로 붙어 있다. ㅁ자 구조의 사랑채와 안채가 옆으로 붙어 있는 구조다. 그 접점 부분에 산실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江湖東洋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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