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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作을찾아서>유용주 시집 "크나큰 침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한(恨)이라면 깊은 한이요,그늘이라면 짙은 그늘이다.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요,그저 천품인듯 타고난 좋은 시인이다.삶의엄혹함.복잡함을 이미 초반에서 거머쥔 사람들 특유의 넘쳐나는 활력이 사방에 빛을 뿌린다.행갈이까지 무시한 이 활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천하의」김지하(金芝河)시인을 놀라게 하는 시집이 나왔다.오랜만에 까마득한 후배에게 흔쾌히 발문까지 써준 金시인.바로 유용주씨의 세번째 시집 『크나큰 침묵』이다(솔출판사 刊).60년 남녘의 최고 오지 전북장수 출신인 유씨는 식당에 서 접시를 닦으며,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등뼈 휘게 일하며시를 배우고 썼다.해서인지 그의 시에는 아름다운 시어나 세련된기교는 없다.삶에서 힘차고 솔직하게 솟아난 시가 우리의 삶을 도닥거리며 고달퍼도 살만하게 만들고 있다.우선 시 『아까운 놈』을 보자.
『내 한참 더운피 주체 못해/(이 건방진 생각 용서하시압)/오는 것마다 잡아놓지 못해/안절부절 좌불안석 우왕좌왕할 때 많았는데/그 깊은 병 고쳐지지 않아/삼십 고개 낮은 포복 무릎까지면서 넘어왔는데/이제 소줏바람 스산하고/피 빠져 나가는 소리눈부시구나/오는 사람 마다 않고/가는 사람 붙잡을 수 없는 당연한 이치/참 뒤늦게 깨닫고 앉았는데/어기여차 저놈은 꼭 잡고싶구나/세상에 나무란 나뭇잎 죄 붙들어 낮술 퍼먹이고/쬐금은 미안한지 김장 무 배추 파는 그냥 지나치고/콩밭 잠깐 들러 입가심하고/수석리 잠홍리 오산리 넓은 들판/온통 금이빨 감잎 냄새 번쩍이게 해놓고/꽁지 빠지게 가야산 골짜기로 달아나는/저,저놈의 가을 햇빛!』 아까운 놈이 누군가 했더니 가을 햇빛이다.천지간을 색깔로 혹하고 표표히 떨어지며 스러지는 가을을 그리는 시에는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되고 내면의 고통도 따르게 마련이다.그 인위적 고통의 흔적을 「자랑스럽게」 남기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좋은 시들은 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나무들과 들녘은 온통 소주에 취한듯 발간 얼굴이다.콩밭은 입가심한듯 반만 취해 있고 월동 김장용으로 무.배추.파는 여직 시퍼렇다.그 가을 들녘은 「피 빠져 나가는 소리 눈부시구나」하며 우리네 삶,더운 피 주체못한 젊음의 고통과 꿈 에 자연스레오버랩된다.「아까운 놈」이란 제목에서부터 시는 일상언어들로만 나가고 있다.억지로 기운 기미도 보이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만 하다.그러면서도 삶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행간에 흐르게 한다.아니 그 고통마저 자연스런 언어의 흐름을 타며 얼마나재미있게 다가오는가.
『이 무식한 시쓰기가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건너는 다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유씨의 시 『출감』을 인동(忍冬)으로 가는 길목에서 감상해보자.
『늦가을 새벽/달빛 아래 길이 앝은 허물로 꼬여 있다/까치독사도 독기를 더 깊게 품고/꿈의 긴 겨울을 버티리라/또아리 튼길은 가는 사람이 풀어야한다/삶의 매듭 또한 마음으로 우선 풀어야지/두런두런 달래듯 바람 불고 잎 저만치 따 라오고/채마밭김장 무 배추 싱싱청청/서릿발 벼 그루터기 파란 싹 여즉/끊질기게 땅을 물어뜯고 있는데/별빛 따라 꼿꼿이 고개 세운/또 한굽이 길이 다가온다/뼛가루 곱게 빻아 길 위에 뿌리며/오래도록걸어간 사람들의 꼬장꼬장한 어깨 가/얼핏 보인다/그래,늦은 것은 후회가 아니다/틀린 어법처럼 한 마리 벌레 되어/천천히 따라가리라.』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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