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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32. 서울올림픽 유치(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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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뒤 정주영 회장(左)이 김택수 IOC 위원과 축배를 들고 있다.

 1981년 5월 말쯤, 올림픽 유치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원홍 KBS 사장도 합류한 올림픽기획단이 매일 롯데호텔에 모여 숙의를 했다.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총회(9월 30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4개월. 전방위로 뛰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친한 IOC 위원들을 초청, 서울시와 국기원을 방문케 했다. 올림픽 유치 활동을 하는데 예산이 없었다. 서울시가 일단 현대에서 3억 원을 빌려 활동을 시작했다.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자 이 돈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IOC 사무총장인 모니크 베를리우 여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로도 ID 신청이 돼 있고, 서울올림픽 공식유치위원 6명 중 한 명으로도 신청이 돼 있는데 하나만 택하라”는 내용이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유치위원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1시간 정도만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지만 국제연맹 회장은 총회 기간 내내 24시간 회의장에서 모든 IOC 위원을 만날 수 있다. 이해득실을 따지니 유치위원에서는 빠지는 게 나았다.

이제 총회가 열리는 독일 바덴바덴으로 떠날 시간이 됐다. 그 전에 정주영 회장은 영국으로 가고, 나는 네덜란드로 갔다. 사전 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네덜란드에서 케델 위원을 만나고, 벨기에에서는 메로드 위원을 만났다. 메로드는 자기 집에서 점심도 대접하면서 조언을 많이 해줬다. 벨기에에서 정주영 회장과 만나 룩셈부르크로 가 룩셈부르크 대공을 만났다.

드디어 바덴바덴에 도착했다. 바덴바덴은 인구 4만 명의 조그만 휴양도시였다. 이때까지 한국인 중 바덴바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스페인의 최원철, 독일의 김만금과 박수남 등 태권도 사범들이 나를 돕기 위해 몰려왔다. 한국에서 최원석·김우중·조중훈·장성환 등 경제인도 속속 도착했다. 정주영 회장은 10만 달러를 더 투입했다. 그러나 유치 자금을 어느 순간에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몰랐다. 스탈바트라는 프랑스식 고급식당이 있었는데 정 회장과 나는 거기서 마리오 바스케스, 켈러, 스탄보, 다슬러, 음바예 등 많은 IOC 위원을 만났다.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준비해간 인삼차와 자수정을 선물했다.

박종규 회장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아디다스 회장 다슬러를 담당했고, 한국대표단은 초드리 위원을 만나는 등 짧은 기간에 열심히 뛰었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IOC 위원은 모두 동원해야 했다. 병으로 누워 있던 말레이시아의 함자 위원을 최호중 대사가 모셔왔고, 귀국 때는 내가 프랑크푸르트까지 에스코트했다.

이연택 총리실 행정조정관은 후방지원팀을 맡아 잘 보살폈다. 당시 한국대표단 공식·비공식 지원 요원은 100명이나 됐다. 바덴바덴 시내에 빈 방이 없어 계곡에 있는 발트호텔을 통째 빌려서 매일 전략회의를 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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