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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칼럼>'입' 봉하는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케네디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미국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최근 뉴스위크에 쓴 글에서 클린턴과 도울 후보간의 이번미국 대통령선거전이 아이디어와 비전의 부재(不在)로 맥빠진 선거전이 됐다고 개탄했다.그는 지금이 일대 전환기 로서 이런 시기에는 참신한 지도자가 출현해야 하는 법인데 클린턴과 도울 모두 정열도,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슐레진저의 이런 지적을 우리나라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대선을1년 앞두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디어와 비전이 풍부하게 제시되고있는가.아이디어와 비전의 필요성은 미국보다 우리쪽이 열배 스무배 더 크고,미국 이상으로 지금 우리도 대전환 기를 맞고 있는데 이런 전환기가 요구하는 비전이 나오고 있는가.
길게 물어볼 것도 없이 대답은 「아니다」일 것이다.대선주자로꼽히는 사람은 미국보다 몇배 많은 10여명이나 되지만 그들 누구로부터도 비전은 커녕 바로 코앞의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발언이 나오지 않고 있다.북한 잠수함이 침 투하고 국방장관이 비리로 물러나고 경제침체로 걱정이 가득한데도 깊이있고 설득력있는 어떤 호소도,처방도 나오지 않고 있다.
소리가 안 나올 뿐만 아니라 그나마의 소리마저 봉쇄되고 있다.대선주자라면 뭐니뭐니 해도 정치권에서는 최일류급(最一流級)인물이다.그런 인물들이 입을 다물도록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대선 논의를 자제하라,조기과열은 안된다는 등의 금족령(禁足令)에 걸려 이들은 근신 아닌 근신을 하고 있다.적어도 대통령이되겠다는 사람들이 평소 뭘 하고 있는지 국민으로서는 알 길이 없게 돼 있고 그들의 목소리는 국회에서도,소속당 에서도 나오지않고 있다.신한국당은 며칠후부터 열리는 지구당개편대회에 예비주자들의 참석을 제한한다는 방침이다.그들이 그나마 입을 여는 기회인 초청강연은 엄밀하게 체크된다고 한다.강연내용은 물론 참석인원.초청배경 등이 조사.보고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당고문이 된지 넉달만에 비로소 첫 공식 고문회의가 열린다고 한다.그것도 「경쟁 자제」를 당부하는 「입막음」용 회의라는 관측이다.소위 대선주자들이 마치 「요시찰인(要視察人)」이된 것같다.도대체 주자들이 아이디어나 비전을 제 시하려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얼마전 이홍구(李洪九) 신한국당대표는 집권당이 젊고 미래지향적인 후보를 낼 것이라고 했다.야당의 두金씨에 비해 상대적으로젊은 후보가 나설 것이라는 말이었다고 하지만 「젊지 않은」사람은 안된다는 뜻도 느껴지는 말이다.젊다고는 보기 어려운 60대주자들은 뭔가 압력을 받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대선후보라면 당연히 당원과 대의원들이 뽑아야 한다.당지도부가 밀실에서 결정해 「이 사람이오」하고 강요할 순 없는 것이다.그러나 『놀랄만한 젊은 세대를 낼 것』이라는 대 통령의 발언이나 이번 李대표의 발언을 보면 수뇌부가 후보를 내정 또는 지명할 것같은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야당은 야당대로 두金씨가 스스로 자기를 후보로 결정하는 형국이니까 거기서도 당원과 대의원은 바지저고리일 뿐이다.
주자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이런 현상은 국가경영에 「고급인력」(?)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에서도 바람직하지 않고,국민에게 후보 됨됨이와 정책을 파악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여권에서는 심지어 내년 10월에 후보를 뽑아도 충분하다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쥐죽은듯 가만 있다가 선거 두달전 홀연히 여당후보가 등장한다면 그의 인물과 정책을 국민이 과연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또 그런 후보가 자기 목소리와 자 기 정책을 낼 수도 없을 것이다.당이 만들어준 공약과 정책을 복창(復唱)하기 십상일 것이다.
슐레진저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는 대전환기에 있다.경제난국을 헤치고 선진국으로 진입할 비전도 있어야 하고,언제 올지모를 통일에 대비한 프로그램도 가져야 한다.거대한 부패구조와 부실.날림의 유산을 청산할 청사진도 필요하고 2 1세기를 맞이할 대전략도 가져야 한다.
이런 크고 엄청난 일들은 밤새워 토론하고 논쟁하고 아이디어를짜도 오히려 부족하다.이런 세기적 대전환기를 맞고서도 유치한 정치공방과 수준 낮은 정치논리가 판치는 정치권인데 그나마 「최일류」로 꼽히는 인물들의 입까지 틀어막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수 없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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