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급증하는 ‘무동기 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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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엊그제 서울 논현동 한 고시원에서 30대 초반의 남자가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른 뒤 투숙자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6명이 숨지는 등 10여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부검 결과 피해자들의 사인은 연기에 의한 질식이 아니라 대부분 심한 자상(刺傷)으로 드러났다. 방법도 잔인했다. 범인은 부정기적으로 음식배달과 대리주차 일을 하는 전형적인 도시빈민이었다. 피해자들 역시 한 달에 17만원가량을 내고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하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많은 시민이 삶의 허망함과 안전에 대한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무시한 것이 범행동기였다니 ‘묻지마 살인’의 어처구니없음도 실감하게 된다.

범인은 수개월 전부터 가스총, 회칼, 연기 속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고글, 등산용 헤드랜턴, 스키모자, 권총형 라이터 등 범행도구를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살인 전문가의 범행을 그린 영화를 보는 듯하고, 지난해 4월 세계를 시끄럽게 한 재미동포 조승희씨의 버지니아공대생 집단 살해사건도 떠오른다.

걱정되는 것은 이 같은 ‘무동기 범죄’가 급증세를 보인다는 경찰청 통계다. 금품, 원한, 치정 등 뚜렷한 동기 없이 불특정인에 대해 무자비하게 행해지는 ‘화풀이형 강력범죄’가 늘고 있다. 올 4월과 7월, 8월에 길 가던 사람과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던 공무원들이 어이없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 일본 도쿄에서도 지난 6월 20대 청년이 트럭으로 행인을 치고 흉기로 찔러 7명을 살해하는 ‘길거리 악마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범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자라는 점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지는 요즈음 이 같은 범죄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막연한 피해의식에 집착하며 한풀이를 꿈꾸는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일 것이다. 그들에 대한 생계대책 마련과 사회안전망 구축이 당연하고도 시급한 대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배려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