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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피치] 156. 무승부는 김빠진 맥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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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LA 다저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맞붙었다. 9회초까지 3-4로 뒤진 다저스의 9회말 마지막 공격. 투아웃에 주자가 없었다. 상대 마운드에는 철벽으로 불리는 마무리투수 데니스 에커슬리. 누구나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해 다저스에서 홈런을 가장 많이 친 타자는 커크 깁슨이었다. 그러나 25개의 홈런을 때린 깁슨은 무릎 부상으로 그때까지 벤치에 있었다. 중계 카메라가 깁슨을 비췄다. '깁슨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다저스의 토미 라소다 감독은 깁슨을 기용하지 않았다. 타순대로 마이크 데이비스가 나섰다. 데이비스가 볼넷을 골랐다. 2사1루가 됐다.

이때 라소다가 "타임!"을 부르고 대타를 기용했다. 깁슨이 절뚝거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깁슨은 역전 끝내기 2점 홈런을 때렸다. 5-4. 다저스의 승리였다. 그때 아나운서는 "지금 내가 본 것을 믿지 않는다(I don't believe what I just saw)"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1차전을 극적으로 이긴 다저스는 기세를 몰아 4승1패로 월드시리즈를 차지했고, 이날의 승부는 지금까지 손꼽히는 명승부로 남아 있다.

94년 봄. 라소다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데이비스 타석에서 왜 깁슨을 대타로 기용하지 않았느냐"였다. 깁슨을 마지막 순간까지 벤치에 앉혀뒀다가 데이비스가 볼넷을 고른 뒤 기용한 배경이 궁금했다. 만일 그때 데이비스가 아웃됐으면 다저스는 졌다. 또 여론은 "왜 깁슨을 쓰지 않았느냐"고 비난했을 것이다. 라소다의 대답은 간단했다.

"비기려고 야구하는 게 아니잖아. (We don't play for a draw)"

비기려면 그 순간에 깁슨을 기용했겠지만 그건 자신이 추구하는 야구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를 만난 뒤 진정한 승부는 승패라는 결과가 있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무승부는 밋밋하다. 승부를 가르자고 맞붙은 두 팀이 승패 없이 돌아서는 모습은 김 빠진 맥주를 마시는 느낌이다. 그들이 혹시라도 '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족해 한다면 그건 오히려 비겁하다. 하나는 활짝 웃고, 하나는 애통해하는 게 더 멋있어 보인다(비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포츠니까).

무승부가 나올 경우 '팀을 위해 싸운다'는 야구의 기본 취지에 어긋난다고 할 수도 있다. 팀은 얻은 게 없지만 개인기록은 다른 경기와 똑같이 그대로 남는다. 결과적으로 '무엇을 위해 뛰었는가'를 반문하게 된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올해 무승부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정규시즌의 25% 정도가 지난 10일 현재 8경기다. 22년 동안 무승부가 가장 많았던 게 16경기(2001, 96, 95년)다. 경기 시작 뒤 4시간 이후, 오후 10시30분 이후, 연장 12회 이후에는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는 규정 때문이다. 이 규정은 '이기는 야구'보다 '지지 않는 야구'를 부추기는 주범이기도 하다. 팬들은 무승부를 원하지 않는다. 무승부는 맛있는 고기를 먹고 난 뒤 이에 낀 찌꺼기 같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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