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만 말고 하늘을 봐야 하는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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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34면

사람은 왜 사나?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일까? 누구나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했을 질문이지만 요즘 더 새롭게 와 닿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유명 여배우의 비극적 결말이 마음을 저리게 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총아, 월스트리트의 어이없는 붕괴는 우리의 생활을 강타한다. 몸과 마음이 아프다. 정신이 혼미하고 세계는 어느 때보다 불안해 보인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실타래처럼 엉켜 버린 오늘날의 고단한 삶에 고전(古典)들은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자. 아테네는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강성한 도시국가로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를 꽃피우며 고대 문명의 절정기를 구사했다. 이 절정기에서 길고 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져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고 만다. 아테네인들은 전례 없는 정신적 공황을 겪는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산다는 의미는 무언가?

여기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현인이 등장한다. 저무는 아테네의 한 시인의 집에서 향연이 벌어지는데 소크라테스가 초대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술자리의 단골 주제는 사랑이었나 보다. 다들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라며 에로스 신(神)을 극구 찬양했다. 술잔이 돌고, 취기가 돈 좌중은 소크라테스 선생에게 묻는다. ‘선생님, 사랑의 꽃밭을 만드는 에로스 신이야말로 우리의 경배와 찬미를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훌륭한 신이 있겠습니까?’ 이에 소크라테스는 예전에 어느 현명한 여인(이는 디오티마라 하는 전설적인 여사제를 일컫는다)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내면에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있다. 우리가 사랑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원하고 변치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이 아름다움을 향하는 인간의 정열을 에로스라 한다면, 이 에로스를 통해 인간은 영원 무궁한 것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은 곧 생산과 출산을 낳는다. 정신적 소산이건 육체적 아기이건 인간은 바로 이 생산과 출산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요컨대 사랑의 핵심은 생산이고 이것은 생명성이다.” (플라톤의『향연』에서 발췌 정리)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사람이 사는 이유를 이보다 더 멋지게 설파할 수 있을까. 디오티마가 얘기한 생명성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다. 개인의 정신과 영혼이 보편적인 선(善)과 아름다움에 결합했을 때 생겨나는, 영원에 닿아 있는 생명성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개인에서 보편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옮겨 갈 수 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새 생명인 ‘아기’를 생산하는 에너지이자 힘이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이 현명한 여인의 이야기가 시공을 넘어 묘한 울림을 준다. 사랑은 ‘영원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라는 정의는 모든 것이 ‘지금’ ‘여기’로 환원되고, 생산보다 소비에 천착하는 오늘날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현재에만 매달려 짧은 인생에서 영생불멸을 누리고자 안달하고 있지 않나. 절대와 영원을 마치 미신처럼 취급하고 발밑의 땅만 챙기며 살고 있지 않나.

영원보다 순간,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만 중히 여기는 오늘날의 우리는 스스로를 폄하하고 위축시켜 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랑마저도 하나의 재화(財貨)처럼 여기며 소비하고 있다. 오직 감각적 쾌락과 땅을 향한 쟁탈전에 몰두하고 있는 우리를 고대 그리스인들이 본다면 과연 인류가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초를 자극하는 재미에 몰두해 가엾은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네티즌들이나, 더 많은 부를 더 빨리 쌓기에만 골몰해 있는 월스트리트의 금융 전문가들이 땅보다 하늘을 바라볼 줄 알았다면 우리네 삶이 이토록 피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나도 좀 더 자주 하늘을 쳐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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