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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프리즘>'저항가수'서 변신 김민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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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과거의 「역사」가 찬란할수록 현재는 빛을 잃게 마련이다.사람의이력도 이와 같아서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은 대부분 그 시대의 종말과 함께 「오늘」의 전면에서 사라지기 일쑤다.
과연 그럴까.아스라히 「저항가수」로 추억되는 김민기(45).
아마 90년대 학번쯤 되는 이른바 「신세대」에게 김민기는 분명과거형의 인물일 것이다.간혹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삼아 그의 『아침이슬』을 불러대도 그 노래가,그 노래를 만든 사람이 어떤 시대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들이 그것을 얼마나 알까.
이점에서 분명 김민기는 90년대 이전의 인물,다시 말해 70,80년대나 「유용한」 지난 세월의 문화적 담론에 불과하다.그도 이점을 인정한다.아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세월이 가면 사람의 입맛(정서)도 변한다.70,80년대온갖 격랑을 몸으로 부딪쳐 보지 않은 사람이 그 시대를 안다는것은 감상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젊음이 들끓는 대학로로 달려가면 거기엔 김민기의 독특한 체취를 발견할 수 있다.스스로 『아니다』고 항변하지만 이제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과도잘 어울릴 수 있는 대학로의 터줏대감이 된지 오래다.『소극장 학전의 문을 연지 꼭 5년이 지났다.쭉 몸담고 있던 연우무대를떠나 혼자 버거운 극장운영을 떠맡게 됐을 땐 앞이 막막했다.』스스로 『가수도,연극인도 아닌 모호한 주변인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가 천착하고 있는 오늘날의 화두는 뮤지컬이다.그는 학전개관이후 쭉 한국형 뮤지컬 형식의 완성을 위해 줄달음쳐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교묘한 「상품 포장술」에 현 혹돼 눈과 귀가 죽어가는 관객들을 위해 그는 우리의 정서와 가락.리듬.모국어가 살아 숨쉬는 뮤지컬 무대를 필생의 목표점으로 잡고 있다.
『외국것이든,창작품이든 노래에 대한 이해가 없다.우리말의 어법을 몰라 노래와 멜로디가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하다.우선 대사를 어떻게 노래로 표현,무대로 꾸밀지 고민이 앞서야 한다.말이 노래로 자연스럽게 풀릴 때 엄청난 폭발력이 발 휘될 수 있다.』 음악과 노래가 뮤지컬의 생명이란 원론적 사실을 김민기는그의 작품을 통해 하나씩 실천하고 있다.그의 이런 생각이 초보적이지만 교과서적으로 반영된 작품이 바로 2년반동안 롱런중인 록뮤지컬 『지하철1호선』이다.
***뮤 지컬에 대한 김민기의 집착과 열정은 결코 최근의 일이 아니다.멀리 고등학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음악적 감수성은 언제나 무대와 연관을 맺으면서 고양돼 온 것이 특징이다.여느 뮤지컬 연출자도 갖출 수 없는 재능이자 장점이다.전에 했던 『노래굿』(공장의 불빛.78년),『노래극』(개똥이.84년),『노래일기』(아빠의 얼굴 예쁘네요.87년) 등의 일련의 작업은 모두 음악과 연극이 결합되는,그의 말을 빌리면 『원시적 공연예술 형태로의 회귀본능』이었다.타이틀만 다를 뿐 뮤지컬도 그가 추구해온 음악작업의 현대적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영역이 멀티미디어화되는 요즘 공연예술의 양식도 새롭고다양화해져야 한다.그러나 언제나 출발점은 무대다.』 거나하게 술이 취하거나 뜻맞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늘 「못자리 문화론」을 펴며 그 중심지는 대학로가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문화의 「소프트웨어」가 대학로에 집중돼 대학로가 튼실한 못자리가 되고 여기서 기른 모를 여러 문화의 논에 옮 겨 심을 때 우리나라 문화전반이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다.
『얼마전 두번째 극장인 「학전그린」을 열면서 나는 원래 극장인 「학전블루」를 완전한 문화의 열린 구역으로 만들기로 했다.
연극.대중가요.현대무용.영상예술등 온갖 장르의 예술인들이 이용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적어도 대학로가 문 화의 중심지라면 핍쇼까지도 용납되는 다양한 문화의 충돌지가 돼야 한다.나는 다만 「독농가」일뿐이어서 「발언」을 하고 싶지는 않다.』 ***김 민기가 문화를 대하는 방식은 농부의 심성 바로 그것이다.이는 당연히 80년대초 김제.전곡.민통선등지를 돌며 손수 농사짓던 4년간의 세월에서 얻은 소중한 체험에서 비롯됐다.그가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었던 안목도 여기서 나왔다.
『민통선안에서의 마직막 해인 83년 어느날 물꼬를 트려고 흙한덩어리를 삽으로 퍼냈다.물줄기가 시원스럽게 터졌다.문득 오랫동안 나를 짓눌러오던 낱말들,창조.생산.진보.예술….지고의 가치로 여기던 것들의 허울을 알았다.농사야말로 인 간의 창조적인노동이 주가 돼 얻을 수 있는 산물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큰 햇살과 바람,흙과 물,벌레들은 서로 돕고 있는데 나는 고작 삽질 한번이 고작이었다.』 나중에 그가 「한살림모임」(89년)의 사무국장을 맡는등 「생명사상」에 경도된 것도 다 이때농사에서 얻은 지혜의 소산이다.
『내 학창시절에는 「지랄」떠는 사람들이 많았다.요즘은 그런 사람이 없다.말로만 그렇지 젊은 사람들도 양순하기 그지 없다.
적당한 「멍석」이 없어서인가.문화의 생명력이야말로 다양성인데….』 격렬하게 살아온 70,80년대를 지나 아직도 꿋꿋하게 90년대식 문화운동가로 버티고 서있는 김민기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충고」는 깊이 새길만하다.

<약력> ▶51년 전북익산.
▶경기중.고를 거쳐 68년 서울대 회화과 입학.
▶70년 양희은을 만나 『아침이슬』등을 지어줌.
▶74~77년 군생활,제대후 공장에서 일하며 『상록수』등 지음.서울대 졸업.
▶78년 『늙은 군인의 노래』『식구생각』등을 묶어 두번째 음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 제작.남의 이름을 빌려 출반했으나 곧 판금.동일방직사건을 소재로 노래굿 『공장의 불빛』완성. ▶85년 연극기획자 이미영씨와 결혼,종화.소윤 두 아들 둠. ▶88년 금지곡 전부 해금.
▶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개관.
▶94년 뮤지컬 『지하철1호선』 제작.
▶96년 2관인 「학전그린」개관.
글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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