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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 갖고 있어도 못 보여줘 답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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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요즘 경제위기를 맞아 가장 고민이 많은 사람 중 한 명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일 것이다. 정부의 환율 방어 ‘약발’은 통하지 않고 야당에서는 “물러나라”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지만 그에게 씌워진 ‘올드 보이’ 이미지는 쉽사리 가실 것 같지 않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통령의 신뢰는 얻고 있지만, 시장이나 국민의 신뢰는 얻지 못하는 사람.”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강만수 장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뒷부분, 즉 ‘강 장관이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대목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강 장관을 끔찍이 신뢰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선 세간에 이론이 별로 없다. 정책에 관한 한 그는 이 대통령의 복심이고, 최고 실세다.

그런 강 장관이 깊은 고뇌에 빠졌다. 외환위기 이후 꼭 11년 만에 금융위기가 쓰나미처럼 한국 경제를 덮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의 자금난, 치솟는 가산 금리, 신용경색, 환율 급등과 주가 급락…. 옛날 영화를 다시 보는 것처럼 11년 전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달라진 것은 국민 반응이다. 외환위기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겪어본 국민들은 공포감에 떨고 있다. 그 같은 ‘환란의 트라우마’가 주식 투매와 달러 매수 속도를 기하급수적으로 높이면서 금융시장은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고, 실물 경기는 예상보다 빨리 가라앉고 있다.

1997년 환란 당시 강 장관은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다. 금융위기가 어떻게 순식간에 밀어닥쳐 한국 경제를 삼키는지 낱낱이 목격했다. 외환위기에 대한 실전 경험으로 말하면 이 시점에서 강 장관만큼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드물다.

정책의 2인자에서 1인자로 올라선 그가 수습해야 할 위기의 본질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강 장관은 근래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조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한다. 현 위기에 결연하게 임하고 있다는 의미다.

10월 11~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 참석을 앞두고 강 장관이 10일 인사차 기자실을 찾았다. 표정이 밝았다. 그는 현 상황에 대해 “힘들다”면서도 “문제 해결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어렵긴 하지만 우리 외환보유액 수준이나 외채 구조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강 장관이 원래 긍정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어떤 비책을 갖고 있기에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일까. 그는 단계적 접근법을 설명했다. 당장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국제수지다. “10월 국제수지가 흑자로 돌아설 것이 확실시 된다. 그러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까지는 불안 심리를 잠재우는 처방을 위주로 쓴다. 그 다음엔 지구전으로 간다.”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난 뒤 지구전으로 돌입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맞아떨어지려면 강 장관은 몇 가지 힘든 벽을 넘어야 한다. 그가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이유다. 첫째는 ‘시장 불안과의 싸움’이다. 시장의 불안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정부 핵심 당국자는 “장관은 패를 갖고 있어도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가용 외환보유액이 200억 달러 미만으로 줄어들었다는 의혹 제기로 시장 불안감이 증폭됐지만 실상 ‘2397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은 100% 가용 가능하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그렇다고 이를 증명하려 외환보유액의 포트폴리오를 완전히 내보일 수는 없다는 게 강 장관의 고민이라는 것.

다른 싸움은 ‘세상의 이목과의 싸움’이다. 그에겐 ‘올드 보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시장과 직접 상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금세 ‘신관치’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10월 6일 아침 은행장과의 간담회가 그런 경우다. 은행장들을 불러모은 것은 취임 후 처음이었다.

외환보유액을 활용한 은행 외화 유동성 백업(back-up) 방침을 밝히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강 장관이 “은행 스스로도 자구 노력이 필요하다. 은행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 대해서는 엄격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세간에선 “정부가 옛날처럼 은행장 군기 잡기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왔다. 재정부 관계자들은 “장관에겐 유독 제약이 많은 셈”이라고 하소연한다.

외환시장의 달러 가뭄 타개책을 두고 제기되는 논란도 비슷하다. 시장에 달러의 씨가 마르자 정부는 자기 금고 돈(외환보유액)은 아끼고 기업이 금고에 비축해둔 달러를 꺼내도록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환보유액 감소가 시장 불안감을 확대시키는 측면이 고려됐다. 하지만 달러를 풀도록 기업을 독려하고 요청하는 것은 기업의 팔을 비튼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게다가 “얼마나 급하면 기업까지 압박하느냐”는 비판도 따라붙을 수 있다. 강 장관 스스로도 여론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 그는 “컨트롤 타워가 어디냐는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내가 확실히(경제팀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전투에 나가 있는 사람을 응원은 못할망정 뒤에서 총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으냐”며 서운한 감정을 털어놨다.

전선 너무 넓혔다는 지적도

‘시간과의 싸움’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당장 국제수지가 그렇다. 강 장관은 10월 경상수지 흑자전환을 확신하고 있지만 정작 경상수지 통계는 11월 말에나 발표된다. 그때까지 시장의 불안심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수 있다. 미국·유럽 증시와 아시아 증시가 서로 악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연쇄적으로 주가를 끌어내릴 가능성도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돈줄은 극도의 초조감 속에 계속 말라 붙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문학적인 공적자금 투입과 구제금융의 효과가 나타나야만 얼어붙은 시장이 풀릴 테지만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반면 강 장관에겐 역대 어떤 경제 수장보다 좋은 여건이 있다.

바로 이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이다. 흔히 대통령의 신임 정도는 얼마나 자주 얼굴을 맞대느냐로 가늠된다. 그중에서도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는 독대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확실한 신임을 입증한다. 강 장관은 9월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이후 거의 매일 청와대에 들어가 이 대통령과 독대 시간을 갖고 있다.

경제현황과 대책을 보고하기 위해서다.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이 배석할 때도 있지만 배석자 없이 이 대통령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당도 강 장관에겐 큰 우군이다.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과 최경환 수석정조위원장은 모두 강 장관의 관료 후배다. 관료로 잔뼈가 굵은 터라 이들은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도 강 장관과 말이 잘 통한다.

강 장관도 이런 환경에 만족하고 있다. 측근들에게 “큰일을 하려면 천시(天時·하늘의 때)와 지리(地利·땅의 이득), 인화(人和·사람의 화합)가 필요한데 지금은 세 가지가 모두 갖춰져 있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 대통령이 500만 표 이상 차로 선거에서 이겼고, 한나라당이 국회의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이 ‘천시’와 ‘지리’라면 당(한나라당)-정(정부)-청(청와대) 정책 라인이 좋은 팀워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인화라는 얘기다.

그러나 강 장관의 저돌적 행보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장관이 자신의 임기 중 모든 것을 다 하려다 보니 전선이 너무 넓어졌다”는 것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원론적으로는 임기 초기에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맞지만 지금처럼 글로벌 경제가 급속도로 위기에 빠질 때는 정부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폭풍우(금융위기)가 전례없이 거세고 험악한 만큼 일단 헤쳐 나오는 게 급선무라는 것이다. MB노믹스의 설계자인 강 장관이 한번쯤 곱씹어볼 지적이다.

이상렬 중앙일보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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