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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이끈 여성지도자 산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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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30년대 서울 종로구 재동에 있던 학교 건물 모습.

 “대개 보통교육은 남녀의 구별이 없으니…(중략) 국가가 어찌 여자 교육을 중요시하지 않겠는가.”

1908년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 황제의 비 효황후가 최초의 관립(官立) 여성 교육기관의 개교를 선포하는 교지를 내렸다. 한성고등여학교,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외국인 선교사나 개인이 세운 사립학교는 많았지만 국가가 세운 여학교는 경기여고가 처음이었다.

이 학교가 15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서울 종로구 도렴동의 작은 한옥에서 출발한 배움터는 종로구 재동과 중구 정동을 거쳐 1988년 강남구 개포동으로 옮겼다. 경기여고는 개교 때부터 선발 시험을 치러 우수한 여학생만을 고집했다. 1973년 고입 선발 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전국의 여성 인재를 끌어모은 ‘일류학교’로 자존심을 세웠다.

동문의 힘도 커졌다. 1911년 1회 졸업생은 31명에 불과했지만 100년 동안 배출한 졸업생이 3만8000여 명. 이들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정부 수립, 6·25전쟁,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리더로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다.

◆민·정·관계 여성 파워의 축=18대 국회의원 중에는 최초의 여성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지낸 이성남(민주당) 의원과 검사 출신 3선 의원인 조배숙(민주당) 의원, 최초 여성 사법고시 수석합격·최초 여성고등법원 부장판사·최초 여성 법원장 등 ‘최초’ 수식어를 거머쥔 이영애(자유선진당) 의원이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17대 국회에서는 김명자·김애실·이계경·이은영·이경숙·홍미영 전 의원이 경기여고 출신이었다. 법조계에는 최초 여성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 전 장관을 비롯해 김영란·전수안 대법원 대법관 등이 있다. 특히 강금실 전 장관과 김영란 대법관, 조배숙 의원은 모두 63회 졸업생이어서 ‘경기여고 63회 법조 3인방’으로 불린다.

재계에서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경기여고 졸업생들의 활약이 크다.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던 노라노(본명 노명자)씨가 경기여고 34회 졸업생이고 최근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로 인기를 끌었던 탤런트 김혜자씨, 시인 강은교, 서양화가 방혜자, 자우림의 김윤아도 경기여고 동문이다.

◆또 다른 힘 ‘안방 파워’=경기여고 졸업생들의 파워는 ‘안방’에서도 나온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은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 동문문집에 기고한 ‘경기여고 출신 아내와 사는 모든 남편들에게’라는 글에서 “빈틈없고 야무져 보이는 네모꼴의 경기여고 배지에 주눅 들었던 적이 있다”며 “그녀와의 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먼저 둥근 원이 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부인 김영희씨,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부인인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 등이 경기여고 출신이다.

특히 44회 졸업생 중엔 유명 정치인을 남편으로 둔 경우가 많아 눈길을 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부인 한인옥씨를 비롯해 고건(조현숙)·이수성(김경순) 전 국무총리, 민주당 권노갑(박현숙)·장재식(최우숙) 전 의원, 이종찬(윤장순)·임동원(양창균) 전 국정원장 등의 부인이 동기동창생들이다. 부인들의 인연을 연고로 한때 ‘경기여고 44회 남편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기여고는 막강한 동문 네트워크를 후배들의 글로벌 인맥으로 이어줄 계획이다. 주영기 경기여고 교장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동문들에게 해외 대학에 진학하거나 교환학생·어학연수를 하는 동문 학생들의 가디언(보호자) 역할을 맡기는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49회 졸업생인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이 나서 선후배 간 끈을 이어주기로 했다.

동문회가 주축이 된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개교기념일인 15일 교내에 100주년 기념관 건립 시공식을 한다. 건립 비용은 모두 동문 모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또 13일부터 3일간 국제교육 심포지엄, 동창의 밤 등 동문들이 참여하는 홈커밍 행사가 치러진다. 15일부터 경기여고 내 박물관에서 양장 패션 100년사를 주제로 한 특별전시회도 연다.

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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