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서류를 담아두는 머릿장 속에서 찾아진 한장의 쪽지가 을희의 지난 날을 마냥 펼치게 했다.20년,30년,아니 40년도 더 전 일이다.
다난했으나 열심히 살았다.그 열성 덕인지,아니면 운이 좋았는지 사업 기반도 착실히 잡혔다.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다.
큰아들 맥(貊)은 뉴욕 유수의 로펌 변호사가 되었다.그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켄트교수 덕이다.자연스레 그의 딸과 사랑하게 되었으나 한사코 켄트교수가 말렸다.딸은 미국인 원예가의 아내가 되었고,맥은 미국서 학교 다닌 처녀와 결혼했다.아버지는 원양어업을 하는 기업가요,어머니는 명문 집안 딸이었으나 본인은 살림과는 거리가 먼 데면데면한 여자였다.그러나 그런대로아들 낳아 살고 있다.켄트교수의 우김은 옳았는지 모른다.맥이 국제결혼을 해서 타관에 있으면 영영 「외국인」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가통(家統)을 이어야 할 큰아들을 을희에게서 빼앗지 않기 위해 켄트교수는 막무가내로 반대했을테지….
켄트교수는 을희의 청을 받아 책을 잇따라 두권이나 펴냈다.그리고 그것으로 인생을 결산이나 한듯 세상을 떠났다.한.일 고대교류사의 진상을 밝힌 그 책들은 큰 화제를 모았고 베스트셀러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를 쇠잔케 했다는 뉘우침으 로 을희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다.일복은 있으나 사랑복은 없는 여자거니스스로 비관이 되기도 했다.
작은아들 혁(爀)은 고교수 딸과 결혼했다.
파리에 있는 아내와 끝내 이혼한 고교수를 따라 서울에 돌아온그의 딸을 한동안 집에 데리고 있었는데 둘이 어느새 맺어진 것이다.임신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결혼시켰다.그날 밤 고교수가 푸념했다.
『선수(先手)를 쳤어야 했는데 한발 늦었어요.』 을희와 결혼하고 싶었는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채 머뭇거리다 딸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무슨 그런 말씀을….』 을희는 농담으로 치부해 흘려보냈다.
새삼스레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으나 좋은 애인감을 놓쳤다는 생각은 했다.
구실장도 결혼했다.출판사서 함께 일하던 여직원이었다.
『이것도 내력인가 봅니다.』 사무실 여사무원과 재혼한 그의 아버지가 웃었으나 을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구실장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든 젊은이들은 짝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글 이영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