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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 휠체어리프트 일본 관광지엔 ‘계단의 공포’ 없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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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12면

1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연인 김현우(37)씨와 눈물의 결혼식을 올렸던 오영자(36)씨. 거동이 불편한 시부모와 인공수정으로 어렵게 얻은 두 딸까지 돌봐야 했던 오씨는 11년 만의 ‘신혼여행’에서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2 사세보항의 유람선 펄퀸호에 오른 장애인들이 선내 장애인 전용 승강기를 통해 갑판으로 올라와 섬들의 파노라마를 감상하고 있다. 3 유후인의 온천여관에는 중증 장애인이 휠체어에 앉은 채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시설도 있다. 4유럽형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의 홍수 체험 극장에 있는 휠체어 전용 승강기.

6일 오전 10시30분 인천공항 출국장. 휠체어 탄 이들, 지팡이를 쥔 채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08 장애인에게 여행의 자유를’이라는 구호 아래 8월부터 한 달 동안 여행박사 홈페이지와 기부 포털사이트인 ‘해피빈’(아름다운 재단과 네이버 공동 운영)을 통해 공모한 수기 300여 편 중에서 선정된 19편의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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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5분 일본 후쿠오카행 대한항공편 탑승이 시작됐다. 여행사 측이 한 달 전부터 공문을 보내는 등 협조를 요청해 두었다더니, 우리 일행부터 먼저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다행히 아무도 불평하는 승객은 없었다.

첫 고비는 비행기 입구에서 있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통로가 좁아 기내용 휠체어로 갈아타고 좌석까지 이동해야 했다. 1급 지체 장애인들이 많아 예상보다 탑승시간이 오래 걸렸다. 드디어 1시간15분 만에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뒷문 쪽에 자동 리프트 시설이 돼 있어 휠체어에 앉은 채 차를 탈 수 있는 장애인 전용차 2대와 일반 대형 관광버스 1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첫날 숙소는 ‘일본의 네덜란드’로 불리는 하우스텐보스의 정문 앞 젠니쿠 호텔. 이튿날 오전 이 아름다운 리조트형 관광지의 풍차와 화원을 둘러본 뒤 홍수 체험과 입체영화 관람을 했다. 계단식 극장에는 휠체어 장애인용 승강기가 따로 있어 관람석으로의 이동이 편리했다. 대부분의 한국 극장들은 장애인석을 형식적으로 맨 앞줄에 지정해 놓아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목이 뻐근해지기 일쑤다.

점심은 사세보의 유람선에 탑승, 유명한 ‘사세보 햄버거’를 먹으며 섬들을 구경했다. 선착장과 배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통로나, 갑판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유람선 내 장애인 전용 승강기 역시 인상적이었다. 유람을 마치고 오니 휠체어를 탄 노인 그룹 두어 팀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휠체어에 산소호흡기까지 걸어놓은 할머니도 보였다. 아하, 바로 이들이 일본의 관광지를 ‘장애인 친화적’으로 바꾸는 힘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노인장기요양보험에 해당하는 개호보험이 일찌감치 도입된 일본에선 노화나 지병으로 걷기 힘들어진 노인들의 여가생활을 위해 관광 인프라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뒤이어 들른 글로버정원에는 가파른 언덕 위의 대저택까지 장애의 정도에 따라 이용 가능한 무빙워크와 리프트 등 다양한 이동시설이 있었다. 무빙워크는 걷기에 지친 비장애인들에게도 안성맞춤이었다. 모두들 발 아래로 나가사키항을 내려다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흘째엔 아침 일찍 오션페리를 타고 세계 최대의 칼데라가 있는 활화산인 아소산으로 향했다. 장애인 차량은 칼데라 인근까지 접근이 허락된 데다, 나머지 길도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았다. 덕분에 휠체어 이동객도 용암 분출로 인해 움푹 팬 칼데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연기를 보며 일본의 자연에 푹 빠졌다.

그날 저녁은 온천으로 유명한 유후인 마을에서 묵었다. 가족온천장 내에 간이 휠체어가 설치돼 있는 여관이었다. 휠체어에 앉고 보조인이 연결된 도르래같은 것을 움직여 주면 탕 속으로 휠체어째 들어가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다. 그런 시설을 갖춘 여관이 흔치는 않다고 했다.

벌써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만찬장의 분위기는 두 부부의 ‘신혼여행’ 축하행사로 절정을 이뤘다. 춘천에서 온 김상록(51·지체장애)·방선자(47·지적장애)씨와 군산에서 온 김현우(37·지체장애)·오영자(36)씨 부부가 결혼 후 신혼여행도 못 가봤다는 사연을 들은 여관 측이 축하 케이크를 마련해준 것이다. 둘째 딸도 장애가 심해 아픔이 많지만 동네 통장 일까지 맡아 할 정도로 남들을 위해 베풀며 살고 싶다는 상록씨,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오랜 연인과 눈물의 결혼식을 올린 뒤 시부모님과 두 아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영자씨의 인사말에 장내는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곧 환호성과 함께 “뽀뽀해”라는 연호가 터져 나왔다. 두 부부가 수줍은 듯 얼른 입술을 맞대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두 부부만을 위한 박수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그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더욱 씩씩하게 앞날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축복하기 위해….

장애인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이번 일본 여행에서 가장 부러웠던 점은 그 어떤 편의시설도 아닌 일본인들의 ‘진심 어린 배려’였다고. 그리고 가장 소중한 선물은 ‘세상엔 나보다 힘든 처지의 사람이 많고 나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것이라고. 이들의 아름다운 여행 이야기는 20일 오후 4시10분 KBS 1TV의 ‘사랑의 가족’을 통해서도 방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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