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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꼬리가 몸통 흔드는 국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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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주가는 급락하고, 환율은 급등했다. 제2의 외환위기가 오는 게 아니냐는 불안이 국민을 떨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더욱 심각하고, 유럽도 흔들흔들한다.

이 와중에 국정감사가 열리고 있다. 국감은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도구다. 규정에 따라, 예산 계획에 따라 제대로 살림을 하고 있는지 국민을 대표해서 살펴보는 일이다. 국감이 제대로 돼야 국민의 세금인 국가예산을 다루는 기관들이 몸조심하고 함부로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20일간 500개 기관을 감사한다는 일정 자체가 무리다. 그런 만큼 1초라도 시간을 아껴서 담당자들을 추궁하고 캐내고 해명을 듣고 반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작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화성에서 온 외계인’들 같다. 대한민국이 작살나든 말든 상대당 흠집내기와 자신의 이름 알리기 외에는 안중에도 없다. ‘정책 국감’은 사라지고 ‘깽판 국감’만 남았다.

행정안전위원회의 서울시 국감을 보자. 민주당 의원의 발언 도중 나온 ‘불륜’이라는 단어를 놓고 반나절 동안이나 의원들 간에 설전이 오갔다. 증인들 불러다 놓고 정작 들어야 할 말들은 다 듣지도 못했다. 불륜이라는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해도 유감을 표명하면 그만이다. 정상적이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외계인’들에게는 국감보다 그게 더 큰일이다.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이름도 길다)의 방송통신위 국감장에서는 한 인터넷 신문의 생중계 여부와 전경 배치를 놓고 또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특정 인터넷 신문의 생중계는 규정에 따라 안 된다. 그러면 끝이다.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야당 입장에서는 국감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재정위에서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환율 폭등 대책회의에 참석하려고 하자 민주당 의원이 막았다. 이유도 없었다. 무조건 ‘장관이 국감장을 떠나선 안 된다’였다. 그러는 바람에 또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

국회의원들 입장에서 보면 국감은 자기 얼굴을 유권자나 대중에게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평소에 일을 하지 않는 의원들일수록 더 그렇다. 국감을 통해 일 년 농사를 다 지어야 한다. 그러려면 튀어야 한다. 평범하면 TV나 신문에 노출되지 않는다.

요즘 연예인들 사이에서 ‘4차원’이 유행이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튀지 않으면 바로 ‘편집’된다. 그래서 튄다. 말도 튀고, 행동도 튄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원은 연예인과 동급이다. 국감 자료를 2000건이나 요구하든지, 국감장에서 핏대를 올리든지, 국감을 방해하든지 뭘 해서라도 관심을 끌어야 한다. 욕을 먹어도 괜찮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쁘게라도 언론에 노출되는 게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다.

국회 출입기자들이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기자들이 왕창 몰려서 관심을 갖고 있는 회의는 일찍 끝나는 적이 없다. 그러다 기자들이 다 퇴장하고 나면 금방 끝난다는 거다.

그래서 신문사 내부에서는 일부러 튀는 국회의원이나 언론플레이를 하는 의원들은 아예 무시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자꾸 언론에서 다뤄주니까 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 아니냐는 얘기다. 사실 이 글에서 국회의원 이름 안 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젠 워낙 매체들이 많아져서 몇몇 언론사에서 무시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잿밥에만 관심 있는 국회의원들이 튀어야 하는 여건은 잘 조성돼 있다.

 지금 국감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 증인을 앉혀놓고 여야 의원들끼리 삿대질하고 욕설하는 난장판이다. 한쪽은 ‘지난 10년을 심판하겠다’고 하고, 한쪽은 ‘현 정부를 심판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국감 왜 하나”라는 국감 무용론까지 나온다. 맞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국감 안 하는 게 낫다.

주가는 떨어지고, 안전하다는 펀드도 반 토막이 났다. 집값은 떨어지고, 대출금리는 오른다. 환율은 폭등해 가족이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은 더욱 죽을 맛이다. 국민은 3중고, 4중고에 시달리고 있는데 가슴에 불이나 지르는 국회의원들은 없는 게 낫다.

사심을 버리고 정책 국감을 해달라는 주문은 하지 않겠다. 다만 사심을 절반 이하로만 줄여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더러운 구더기가 생기더라도 장은 담가야 하니까.

손장환 기획취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