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정동 교수의 '세계 경제의 핵 화교' ④] 화교의 현지화(現地化)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화교들은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중국인과 다른 기질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중국인과 다른 화교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보했다고 보기엔 부족하다. 화교들 역시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중화사상(中華思想), 즉 한족(漢族)의 문화가 가장 우수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화교들은 모국에서 중국문화를 가져오는데 열성적이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화교사회에 중요한 특징이 생긴다. 바로 ‘화교의 현지화(現地化)’다.
화교의 현지화란 말 그대로 현지, 즉 정착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중화사상으로 굳어진 그들의 사상이 어떻게 현지 사회에 동화된 것일까? 그 이유는 일단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남아시아의 각 나라들은 식민지 통치를 벗어나 독립하게 됐다. 이에 따라 동남아시아 정부들은 국가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부는 서구기업들을 국유화했고,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여러 방법을 통해 기업들을 장악했다. 이외에도 독립을 한 국가들은 경제권 장악을 위한 나름대로의 정책을 펼쳤다. 화교들도 동남아 각국이 그 경제권을 쥐려는 정책에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동남아 각국은 화교들과 화교자본을 그들 국가의 경제권 밖, 즉 중국의 자본으로 취급했고 화교들에 대해선 강압적으로 대했다.

대표적인 정책으로 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 억화부마, 화교를 억제하고 말레이시아인들을 지원하는 정책) 정책과 인도네시아의 경제 토착화 정책이 있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외에도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새로운 중국인의 이민을 제한했고, 화교의 정치활동도 제한하거나 금지했다. 심지어는 외국 국적을 가진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금지하고 재산몰수와 강제이주를 단행, 그야말로 박해를 가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현지의 언어를 쓰고, 현지의 법을 따랐으며, 어떤 화교들은 현지식으로 이름마저 바꿨다.

하지만 화교들이 꼭 타의에 의해 현지화를 택한 것만은 아니다. 화교들 사이에서도 현지 사회에 동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계속되는 반(反)화교 폭동 속에서 화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모국이 그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중국인의 이민이 불가능한 이상, 현지에서 적응해서 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이렇게 현지화된 화교들을 화인이라 부른다. 화인들의 2세가 늘어남에 따라 화인의 수가 급증한다. 또 2, 3세로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중국인으로서가 아닌 화교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게 된다.

검소한 생활·높은 교육열, 중국인과 다른 화교만의 기질

만만디와 관시(關係). 화교들은 중국인 특유의 기질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또한 모국인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와 계속 함께 해왔다.

하지만 화교가 그저 중국인의 기질을 가지고, 중국의 역사를 그대로 쫓아가기만 했다면 지금의 화교와 같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성공하듯이, 순자가 ‘청취지어람이청어람(靑取之於藍而靑於藍,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이라 말했듯이, 화교들은 그저 중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보하면서 더욱 성장했다.

그렇다면 중국인의 기질과 다른 화교의 기질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중국인과 화교의 다른 점을 찾으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중국인과 화교는 같은 민족이고 같은 뿌리를 갖고 있지만, 중국인은 중국에서, 화교는 중국이 아닌 타지에서 생활했다는 차이점이 중국인과 다른 화교만의 기질을 갖게 했다.

화교들이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있었을 때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중국인이었고, 모든 생활이 중국인에게 편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 중화사상이 그들에게 자부심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화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모국을 떠나 대륙의 중심에서 생활하던 주류 민족에서 다른 나라에 끼어 사는 소수 민족이 됐다. 다른 많은 소수 민족들과 같이 화교 역시 모국이 아닌 땅에서 박해, 차별 대우, 정치적 억압들을 피할 수 없었다.

화교사업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민 1세 중 90%는 전쟁을 경험했고, 40%는 문화혁명과 같은 정치적 대란을 겪었으며, 32%는 가정을 잃었고, 28%는 경제적 재난을 맞아 막대한 손실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수치 인용 : ‘화교’ 정성호, 살림)
소수 민족이 된 화교들은 살아남기 위한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언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었다. 바로 절약과 교육이다.

6·25 한국전쟁 후 폐허가 돼버린 땅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힘은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던 절약과 교육의 힘이었다.이같이 화교들은 살아남기 위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시했지만 돈이 적게 나가는 것을 더 중시했고, 자녀를 교육시켜 후대에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을 희망했다. 이로써 검소한 생활과 높은 교육열이 화교들의 기질로서 자리 잡게된 것이다.

글=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www.uics.or.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