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의 家] 최하림씨 양평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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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하림이 문호리에 새 집을 지었다. 시인이란 이름 앞에 '가난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게 퍽 어울렸던 최하림이 이제 그 수식어를 떼버려야 하게 생겼다. 이렇게 집이 좋아서야 맑고 투명한 최하림 이미지에 금이 가는 게 아닐까 했더니 그는 "그런가요?" 수줍게 웃었다. 그러나 최선생의 집은 부자용의 근사한 전원주택은 아니다.

서울이라면 다르겠지만 시골 마을치곤 작은 땅인 대지 75평에 건평 40평의 조립식 목조주택 아래층에 안방과 부엌과 거실, 이층에 서재가 있는 방 하나짜리 이층집이 그의 새 거처다. 땅 사는데 4000만원, 짓는데 8000만원을 예상했으나 결국 2000만원이 초과되어 1억원이 들었다. 이 집은 내부 구조, 짓는데 드는 비용, 놓인 위치, 도시와의 거리들이 두루 은퇴 후의 실버부부를 위한 주거공간의 모델이 될 만하다고 여겨 독자에게 소개한다.

그가 문호리에 집을 짓게 된 건 순전히 몇 종류의 만남 덕분이었다. 지나다 무심코 들러본 서종 갤러리에서 차를 들고 나온 사람이 전에 알던 시인 이달희씨였다. 그가 최선생에게 프랑스에서 실내건축을 공부하고 돌아온 여성 건축가 김수를 소개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건축가는 이웃해 살 노부부를 찾고 있었다.

두 가족은 의기투합했다. 문호리의 산아래 땅 150평을 평당 50만원(2003년 5월)에 샀다. 집에 돈을 많이 들이는 건 어리석다는 생각에도 합의했다. 건축비를 최소한으로 지출하자면 조립식 패널을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에도 동감이었다. 땅은 똑같이 둘로 쪼갰다. 터가 좁은 대신 고맙게도 앞산이 눈앞에 바짝 다가와줬다. 그걸 실컷 집안으로 끌어들이면 정원 크기는 무진장이 될 것이었다. 두 집 사이 울타리는 물론 없고 앞집과의 울타리도 없앴다. 앞집 잔디마당과 텃밭이 자연스레 내 뜰로 편입되어줬다. 버리면 얻는다는 진리의 구체적 실천이었다. 스무걸음 걸어가면 물맑은 개울이 제법 졸졸대며 흐르고 디딤돌 놓인 개울을 훌쩍 건너뛰면 바로 산이 나왔고, 창앞에 서면 숲의 한가운데서 맡던 싱그러운 오존내음이 물씬 풍겼다.

"창이 열일고여덟개 되지요? 그게 다 푸른 풍경화입니다. 게다가 매일 조금씩 변해가죠. 사방으로 창을 내니 향의 개념이 없어지데요. 전에는 북창은 안되는 걸로만 여겼거든요."

그러나 최선생이 이집 설계에서 정작 마음에 드는 건 실내에 자그마한 모퉁이를 여럿 둔 점이다. "건축용어로는 데쿠보쿠라고 한답니다. 요철이죠. 환하게 트여서 넓어보이는 게 아니라 모퉁이를 두어 비밀스러운 공간이 여기저기 생기게 만들었어요. 집이 말을 건네는 것도 같고 숨쉬는 것도 같고 또 내 몸을 숨겨줘 아늑하기도 하고."

이층서재는 벽없는 원룸이지만 데쿠보쿠 때문에 방이 두 세개 연이어진 효과를 준다. 그 한 모퉁이엔 딸이 중학때 쓰던 침대를 '물려받아' 놓았다. "이젠 책도 잘 안 읽혀요. 읽다가 여기서 잠들려고…"

목조주택이라 이 집은 소리가 은은하게 울린다. 최선생은 그 작은 메아리를 아주 좋아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좀 요란한 편이지만 평소에는 바깥의 새소리, 아침 서리가 녹는 소리, 아내의 발소리가 조용하게 울려요. 그 울림이 어찌나 좋은지." 자신의 목소리와 말 내용을 음미하듯 느리게 말한다.

그가 이곳 양수리에 자리잡은 건 두말할 것 없이 강 때문이었다. 잔잔하게 반짝이는 물, 물가의 갈대들과 강위로 날아가는 새들 때문이었다. 최선생은 퇴임후 (전남일보 논설위원) 광주에서 충북 영동을 거쳐 다시 문호리로 이사했다. 나는 최선생이 영동 호탄리에 살 때 그 집에 가본 적이 있다. 지금은 한강을 건넜지만 그때는 금강을 건넜었다. 그 집 역시 푸른 들과 하늘이 싫도록 내다보였다.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바깥풍경을 내다보는 것이 최선생의 당시 일과였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바깥출입이 부자유스럽던 그는 진종일 앉아 새가 날아가는 하늘과 하늘이 내리비치는 무논을 내다보는 게 직업이라고 했다. 그날 들었던 어눌한 말은 지금껏 선연하다.

"뒷산에 바위가 드문드문 박혀 있어요. 그게 내 눈에는 꽃으로 보여요." 시적이고 선적인 말이었다. 최하림 시의 핵심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 고요하던 영동에서 4년을 살았다. 그러나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람이 그립습디다. 내가 농부가 될 수 없으니 농촌사람들과 나눌 화제가 없어요."

그게 힘들어 결국 도시 근처로 돌아왔다. 성장해 분가한 아이들 근처로. 친구들 근처로. 양평 와서 새로 친구도 사귀었다. 벽에는 그 친구들의 그림만 걸기로 했다. 감성적이고 감미로운, 천상 시인의 얼굴인 젊은 날의 그의 표정을 담은 김승옥의 유화와 이제하의 크로키도 걸어뒀다.

이제 그는 발음도 걸음걸이도 거의 완벽해졌다. 긴 투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산에서 꽃을 캐와 뜰에다 심는다. "강운구는 산꽃은 산에 두고 보라고 말하지만 나는 흔한 건 좀 캐다 심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나도 얼른 북한산에서 제비꽃을 캐다 심은, 가슴 조마조마하던 비리를 고백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자연이지요."

그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이다. 가만히 앉아서 오래오래 한 풍경을 바라보는 고요와 투명이 바로 그의 시라고 생각한다.

"새가 날아가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면 새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요. 주변의 공기를 한자락 끌고 가지요. 사람의 시선도 끌고 가요. 아마 온갖 미생물의 시선까지 끌면서 나는 걸 겁니다."

요즘 그는 새이름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전화기 옆에 '한국의 텃새'란 책을 놓아두고 새의 몸통이 보일 때마다 이름이 뭔지 찾아본다. "이게 다 사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새 서재의 이름이 뭐냐고 전화로 믈어봤다. "이름을 짓기는 했는데 부끄러워서…." 자꾸 물었더니 '水流花開明書之室'이란다. 수류화개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과 고요인 줄 알겠는데 명서는 뭐냐고 또 물었더니 이번에 새로 태어난 손자의 이름이란다.

"아이들이야말로 살아 꿈틀거리는 사랑덩어리예요. 시보다 아이가 훨씬 더 좋아요." 할아버지가 되기 이전에 최선생이 했던 말이니 그 사랑에 대해 새삼 무슨 말을 더 하랴.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사진=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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