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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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무실엔 을희와 구실장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교정을 보던 편집담당 여직원과 함께 밤 열시께 퇴근하려다 남기로 한 것이다.
몇번씩 애써 고쳐 그리곤 하는 구실장을 혼자 놓아 두고 집에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피란지 부산의 출판사 구석에서 숙제그림을 그리던 어린 날의 모습이 선하여 더욱 안쓰러웠다.밤참으로 막국수까지 시켜 권했으나 그는 젓가락도 대 지 않았다.
고심 끝에 완성된 표지 디자인은 을희를 흡족하게 했다.
켄트교수의 해당화 그림이 앞면과 뒷면에 걸쳐 이어져 있고 모래뻘을 때리는 바다의 푸르름 속에 책 제목이 해당화 꽃빛으로 선명했다.
『수고했어요.아주 좋은데요.아름답고 호소력이 있고 눈에 잘 뜨이고….』 을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구실장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했다.을희는 손수건을 꺼내 옛날처럼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
『이 땀 좀 봐!』 구실장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것을 보고을희는 얼른 뒤돌아섰다.
『자,어차피 통금시간이 되고 말았으니 느긋하게 밤참이나 들어요.새벽 네시까진 여기 갇혀 있어야 할테니까….』 막국수 쟁반을 들고 온 을희 발치에 구실장이 별안간 엎드려 말했다.
『부탁 말씀이 있습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짜낸 듯한 마른 목소리였다.
『구실장,이게 무슨 짓이에요? 일어나 앉아 말씀하세요.』 을희는 구실장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다 말고 타일렀다.
『제 동정(童貞)을 받아 주십시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멍했다. 『직원 주제에,어린 주제에 분수도 모르는 짓이라 크게나무라실 걸 각오하고 감히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오래도록 생각해왔습니다.제 동정을 바칠 분은 서여사님밖에 안 계시다고 마음먹어왔었습니다.부탁입니다.』 이 청년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어안이 벙벙했다. 구실장은 열병 앓는 사람처럼 마른소리를 또 한번 토했다. 『제 동정이 주체스럽습니다.존경하는 서여사님에게 바치고나면정말 홀가분할 것같습니다.동정이 별 건가,몸 파는 여자에게나 던져버려도 그만이지,수없이 되뇌봤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황당하고 난감했다.
을희는 자신의 권위가 짓밟히는 것을 막으려는 듯 사장 의자에앉아 입을 열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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