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최진실, 미안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어제 아침 막 출근하려던 참에 아는 이가 전화로 제보를 해왔다. “탤런트 최진실이 자살을 했답니다. 벌써 119 구급대가 다녀갔대요.” 한동안 정신이 멍해졌다.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인 듯했다. 몇 가지 정황을 추가로 알아보고 나서 신문사 사건 담당 기자에게 급히 연락했다. 뉴스전문 케이블TV 채널에도 아직 기사가 뜨지 않고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의 징그러운(?) 속성 탓일까. 그 와중에도 ‘잘하면 인터넷판은 특종이겠구나’는 기대감까지 스쳐갔다.

처음 출연한 드라마 ‘조선왕조 5백년’에서 대사도 없는 궁중 시녀 역을 맡았던 최진실이다. 남보다 화장을 짙게 하고 출연했다가 PD의 호통을 들었단다. “어이, 작은 시녀. 넌 명동에서 온 시녀야? 분장이 그게 뭐야. 너 빠지고 이따가 대비가 방에 들어갈 때 쭈그리고 앉아 문 열어주는 거 해. 얼굴 보이면 안 돼.”(자전소설 『신데렐라는 없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최진실에 대한 나의 기억도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모 전자업체 VCR 광고(1989년)의 대사에서 시작된다. 페미니스트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만,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카피는 이 땅의 보통 남자들을 위로하고 다독거려 주는 약효가 정말 대단했다. 노래 가사로 치면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문화평론가는 어렵게 자란 그녀의 성장 배경, 즉 ‘수제비의 미학’ 덕분에 기성세대에 잘 먹혀들었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특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최진실이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데올로기니, 가부장이니 하는 메스를 최진실에게 들이대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좋으면 그저 좋을 뿐이었다. 전 매니저 피살, 조성민과의 이혼 등 몇 가지 사건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보다는 ‘최진실다운’ 밝은 뉴스에 주목했다.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의 근검절약, 소년소녀가장과 대학에 몇 천만원씩 기부하는 선행, 이혼 후 아이들의 성(姓)을 자신의 성으로 바꾼 당당함과 꿋꿋함까지…. 데뷔 초기의 귀여운 또순이에서 성숙하고 독립적인 여성·어머니로 이미지가 발전하는 최진실이기에 동시대에 산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어제 아침에 그런 이미지는 산산이 깨졌다. 자살이 맞다면, 우울증을 앓았다는 말이 맞다면, 그녀는 어딘가 어두운 심연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깊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살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자살 행위 자체는 함부로 설명하거나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자살은 힘겨운 삶의 정점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의식을 넘어서는 미지의 장소에서 나오는 것’(앤드루 솔로몬 『한낮의 우울』)이라고 하니까. 확실한 것은 내가 아는 ‘최진실다움’은 겉모습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최진실에게 미안하다. 그토록 고통의 심연을 헤매고 있었던 것도 모르고, 껍데기 이미지만 받아들여 만화 주인공처럼 마냥 행복할 것으로, 행복해야만 할 사람으로 여겨왔기에 참 미안하다. 나는 최진실이 언젠가 오드리 헵번 같은 박애주의자 할머니로 거듭날 줄 알았다. 김혜자처럼 곱게 나이 들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김수미처럼 마파도를 휘젓고 가문의 영광을 외치며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 사람으로 생각했다. 갓 마흔에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 가지 더 미안한 게 있다. 자살의 전염성을 감안해서라도, 나는 앞으로 더 이상 최진실을 추모하거나 언급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최진실은 갔지만 또 다른 최진실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미 안재환 이후에 여러 ‘피해자’가 나왔다. 최진실도 그중 한 명일지 모른다. 뒤늦은 푸념일 것이다. 최진실이 진작에 세상에 대고 “나 너무 힘들어”라고 부르짖을 수는 없었을까.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는 없었을까.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

[최진실 자살 충격]

최진실 죽음까지 조롱…'얼굴 숨긴 인격 살인' 악플

데뷔초…"김희애 뒤에 미소짓는 아가씨 잡아와"

"가족 불편한 얘긴 물론 성형까지 공개돼"

최진실 모방 자살 어쩌나…50대女 욕실서 목매

도대체 누가…"당신 가족이어도 그럴거냐"